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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c Story

보는 만화, 느끼는 만화, 행복한 만화. 그리고 감상하는 만화

정말 가끔 나오는 질문이지만 '만보는 과거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계속 돌아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것은 정말로 누가 보아도 훌륭한고 아름답고 멋지고 끝내주는 작품인가? 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도 처음에 몇 권, 몇 십권일 때는 거의 한달에 한번 이상으로 돌아보고 또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몇 백, 몇 천 몇 만권이 되면서부터는 확실히 어려워졌습니다. 실제 만화책 한 권보다 좀 두꺼운 잡지 한 권은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것을 다시 발견하고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에 하루 이상 걸려서 읽게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한국 취미인 친구들과 나누어 볼 때는 사실상 쉽게 만화책을 구해보기 어려웠고 각자 살고 있는 지역 만화점포, 대여점에 어떤 책자가 들어오는가에 따라서 보게되는 기준도 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조금 커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보면 조금씩 서로가 생각하고 느낀 감상의 차이점이나 만화책에 대한 기준이라는 것도 살짝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좋아하는 작품, 좋아하게된 만화에 대한 이야기나 구성은 확실히 어느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중 하나가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 얼마나 추억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겠지요. 이후 일본에 갔을 때 그곳에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대만,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온 친구들과 만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보면서 재미있는 느낌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서로의 감상, 그리고 차이점에 대한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고 느끼는 기준이 지역, 연령, 성별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가치관이 확실히 나누어진다는 것이지요. 제일 놀라운 것은 같은 나라, 같은 세대라고 해도 그것을 나누어보는 기준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또 세분화되는 것이 자꾸만 나온다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아 그래 그 만화는 좋은 작품이야" 라는 감상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좋은 때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 이상으로 자세한 것을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어렵지요.



반면 좋은 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또 즐거운 일입니다. 과거에는 주변에서 같이 만화책, 애니메이션,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가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묘한 소외감을 느끼고 살았지만 지금은 그런 분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제적인 여건이나 취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족환경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대한민국 사람이상(한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는 사람부터)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때는 전혀 소통이 없다가 모뎀통신문화가 시작되며서 이런저런 구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이나 해외 친구들과는 일본 관련 교육기관과 산업체등을 돌아다니면서 친분을 쌓게되었고요. 나름 웃긴다고 한다면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와 2010년대는 아주 확실한 세대별 구분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7~80년대와 달리 80년대 이후로는 거의 3~5년 단위로 세대별 구성이나 느낌, 단위적인 계산이 완전히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묘한 데자뷰인데 이런 것들을 저는 1990년대 초에 일본에 가서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개인주의, 향락주의, 질서, 배제, 계산 등등을 생각했습니다. 정작 그것은 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외된 작은 생각의 일부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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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돌아와보니 한국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미주지역이나 유럽에 있는 친구들의 생각이라는 것도 조금씩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대별 구분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나 너보다 한살 더 먹었거든!"이라는 자기방어적 수단이 아니라 이것저것을 통한 구분에서 얼마나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같은 감상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향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도 있지요. 가치관의 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 완고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은 확실히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살 때 본 <A>라는 만화는 그 자신의 기준에서 완벽하게 100점만점이라는 느낌을 선사한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인생경험치를 무시하고서라도 A라는 작품에 대한 가치관은 그저 완벽하고 멋진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에 대한 취미인들끼리의 감상기준은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구에게는 1점의 가치조차 없는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이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취미적인 문화에는 그것에 대한 가치관이나 기준을 어디로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특히 세대별 가치로서 나누어지는 기준은 대부분 '너는 아직 어리니까 모른다', '너는 경험이 적기때문에 그정도밖에 못 본다'라고 나이를 가지고 나누어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다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연륜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몰아버리는 경우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번에 '스캇 필그림' 식으로 요새 애들 만화로 그려내도 통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가 요구하는 모습을 과거 세대는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기존개념과 대립되는 현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80년대는 90년대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지만 2000년대는 60년대 작품 이해를 가지기 어려운 것처럼 2010년대 작품은 오히려 70년대에게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아니 이해영역 밖에 속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보지요.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나 느낌, 세태는 각 기준으로 다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기준이 묘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전후 몇년이라는 영역이라고 하겠지만요. 1950년대 사람이 자기 전후 +-20년 전후 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표현은 충분히 100점 영역대에 들어가지만 그시간대를 벗어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아무래도 감각적으로 좀 거시기 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 30년 이상까지도 그 감각적인 기준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드물지요. 피가 되고 살이되고 돈이되는 것이 아닌 취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고전 명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문학, 예술영역에서는 -1000년까지도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메이저 문화이거든요. 때문에 그것을 지도하고 훌륭하다고 말을 하는 기준이 확실하게 있습니다. 학문도 있지요. 예술관련 이해와 도움을 주는 다양한 책자들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역사의 증인들과 저자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인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전체 인구의 25% 정도가 인정을 하는 '예술영역'작품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아직 역사가 그렇게 없어요. 때문에 그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지금 감상해나가는 세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완벽한 기준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수많은 문화선진국인구들 중(이 문화선진국이라는 것은 그 나라 문화 경제기준으로 만화가 출판되고 보급되어 있으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나라가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족 영역에 속한 인구를 말하면 약 20억 전후라고 합니다. 세계 인구의 1/3이 문화적인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여건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다만 이것은 그 조건을 충족할 뿐, 그것을 확실히 즐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국 영역에 들어가 있는 한국 인구가 5천만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모든 5천만이 전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행복해 한다는 것은 아니거든요.

2009년도 비공식 조사에 따르면 한국 일본 중국에서 만화를 즐기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는 인구수는 1/20000. 전체 관람문화 인구 중  적극적인 활동영역을 가진 이는 1/160 ~ 1/180이라고 합니다. 즉, 320만분의 1확률로 만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서브컬춰 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일본+중국 인구를 보면 15억 정도가 됩니다. 이 수만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근대적인 세대별 구분이 확실한 나라인만큼, 1900년대부터 2011년까지 문화적인 기준이 확실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대별 구분도 가장 쉽게 되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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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식욕습관에 따른 문화적 기준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채식주의자가 가징 대표적인 외적 변화, 소수문화로 인정을 받고 있지요) 이런 것에 따르면 건강적인 식습관에 따른 해석적인 문화라는 것은 대중적인 문화에서 소수로 인정되는 서브컬춰 부분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즐기는 문화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채식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주장과 더불어 생물에 대한 존엄성을 논하는 것이 채식주의의 근본이라고 하면 만화, 애니메이션 향락문화는 그것을 기준으로 보는 여타 문학적인 부분과 비교할 때 훨씬 고도의 작업성과 표현예술이라는 형태로 상업적인 기준을 논하게 됩니다. 가끔 애들적인 논리에서 보면 소설 책(전 1권)이 100만권 팔린 베스트 셀러보다 전세계에 1억권이 팔린 시리즈 40권짜리 만화가 더 위대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전세계 인구 60억중 1/3이 보는 만화경제영역에서 1/320만 영역에 속한 만화관람에서는 당연히 만화책은 위대한 문화이자 그것을 감상하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이들에게 지고한 행복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말을 하게됩니다.

가장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한다면 나이도 여기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까말한 그대로 1/320만 영역에 속한 '기준감평자 : 基準感評者'들이 어떤 것을 기준으로 잡는가에 따라서 좋은 작품, 만화에 대해서 논하는 기준도 바뀝니다. 그런데 그 중에 이 세대별 감상에 대한 분류라던가, 지역, 환경에 따른 감상기준에 따른 것이라는 것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문화적 기준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사회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좋은 명작은 1980년이라고 해도 동감할 수 있고 1990년, 2010년이라고 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보는 기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기준입니다. 심지어 동일 언어권이 아닌 번역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런 감상기준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본래 있지도 않은 표현과 문화에 대한 이해영역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는 것이지요. 착각은 자유지만 그것을 그냥 단순한 자유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즐기는 기준에서 굉장히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성적인 표현이나 문화적 이해도 확실히 이전과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1980년대 한국과 일본과 중국에서 표현할 수 있는 만화영역이라는 것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가지고 우월성을 느낀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은 의외성과 더불어 지역, 세대, 그리고 문화적인 기능성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다시 기준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성숙한 만화, 애니메이션 감상은 여전히 혼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 명작과 비교할 수 있다는 고전 비교, 비평문학이라는 점은 대부분 어떤 기준을 가지는가에 따라 다른데, 그런 고전과 현대, 미래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수는 1/320만 보다 더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 문화, 음악 등에 이어서 새롭게 문화영역으로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이 음식문화인데 그것들은 대부분 역사와 함께 그것을 가지고 논하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재료, 기술, 그리고 서비스정신 이라는 형태이지요.

물론 맛에 대한 기준도 남달라서 영국의 a씨에게는 맛난 음식이라고 해도 미국 b씨나 태국 c씨가 그것을 맛있다는 감상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대중의 입맛'이라는 것은 대중이 먹고 살아가는 음식문화에서 기준을 하기 때문에 세계화가 이루어져가면서  대중적인 기준을 많이 만들어 갑니다.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패스트푸드체인점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일부 지역문화였던 음식들이 지금은 어느정도 세계 공통영역에서 다같이 즐길 수 있는 음식문화로 확장되고 있으니까요.

소수문화가 대중문화로 영역을 넓혀가는 가장 대중적인 기준입니다. 이후에 전자기기와 통신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음악과 영화라는 분야가 대중문화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음악은 고전적인 영역에서 문화사회가 즐기는 것인데 그것을 어떤 형태로 포장하는가에 따른 여러가지 기준점이 바뀌면서 더욱 확실한 끝장을 보여준다고 하겠지요. 물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과거에는 손편지 문화가 삐삐, 그리고 이후에는 핸드폰과 스마트폰이 그 영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쪽은 경제적인 효과와 더불어 많은 선진국 문화가 가지는 향락 중 하나이지만 전세계 인구가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어떤 애들을 보면 착각을 해요. 한국에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다른 외국 세계에 나가서도 당연하게 즐길 수 있는 권리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런 영역보다 훨씬 더 떨어지는 보급력을 가진 것이 만화, 애니메이션 감상영역인데 말입니다.



만화를 보고 감상하고 즐거워 하는 것은 당연한 유희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과 그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는 장소를 찾게되는 것은 유흥적인 부분입니다. 더불어 보면 나도 즐길 수 있고 너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을 찾자는 것이고 이것이 모여서 공통된 즐거움의 요소가 되고 이것이 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즐거운 것이 됩니다. 이후 기획자들은 또 그것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즐거움을 만들게 됩니다. 한 조류,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인데 그 흐름은 마치 유행하는 패션과도 같아서 어느정도 시대를 거치면 돌고 도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문제인 것은 그것을 짧은 경험이라고 해도 보고 경험하고 또 보게되는 취미인들입니다. 30년전에 본 것같은 그런 느낌이 다시 지금 나온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이 1000년전에도 바다와 육지를 그렸고 500년전에도 그렸습니다. 100년전에도 그렸고, 50년전, 30년전, 10년전, 1년전에도 예술가들은 그것을 그렸습니다. 장소에 대한 해석과 기술적인 분류, 표현하는 기업에 대한 문화적 구분과 사회적인 이해등을 바탕으로 해서 그에 대한 가치를 따로 논할 수는 있겠지만 유흥적인 부분에서 본다면 그것은 큰 가치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보기 좋아서 가져다 놓는 그림' 그것도 돈을 주고 구입해서 장식해둘 수 있는 유력자, 거상, 귀족들의 유희였다는 점에서 기준을 두고 이후 수많은 문화적 가치에 있어서 그에 준하는 논리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요.



사회현상으로 보지요. 부와 권력을 가지고 부패,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해를 하기조 살아가는 이가 현실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년만화에서 그려지는 정의와 악의 대결을 보면 사실 현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만화에서는 그것을 단죄하고 물리칠 수 있는 존재가 그려지고 이후(만화에서 스토리가 끝난 이후)에 대한 것은 그냥 모두에게 행복한 것이라는 감상으로 남겨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예술영역 작품들이 다 그렇습니다. 문학, 미술 작품들에서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어떻게 되었다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 모든 것을 마감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60만 시간이라고 하면 그중 약 1000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드라마로 꾸면서 보여주고는 이후 이야기는 그냥 '행복했다'라는 단어로 마감을 해버립니다. 그래도 그것을 가지고 모두들 감동하고 느끼고 즐거워 합니다. 그 긴 인생 중 단 1천시간뿐인 이야기라고 해도 (극단적으로는 더 짧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 잘되었을 것이라고 나름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현실에서 뜯어고칠 수 없는 이상적인 대립논리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극명하게 그 중심기준이 나타납니다. 악은 악이고 정의로운 존재에 의해서 확실하게 끝나지요. 사랑을 위한 구조론도 어디까지나 마련된 주인공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생각하고 굴러가게됩니다. 그나마 이전작품 세계와 달리 근래에는 주변 인물구도, 상대편에 대한 상황구조까지 보여주는 경우가 제법 많아졌지만 당연히 주인공이 할애받는 인생(지면, 컷 수, 시퀀스 분할 등)수는 압도적으로 조연보다 많습니다. 사실은 다 똑같은 시간, 공간,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가고 있는데 말이지요. 판타지나 SF라면 다른 시대, 차원, 문화를 가지고 혼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런 부분이야 말로 진짜 현실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점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외계인, 악마, 악당들이라는 존재들 속에 사실은 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깡패같은 사람이 와서 같이 만화를 보고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선과 악이라는 사회적 개념보다 그 안에서 공감하는 만화적인 상상력에 즐거워하는 마음이 더 생길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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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적인 작품들은 시대를 대표하고 그 문화영역이 가지고 있는 세대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런 작품들이 등장할 수 있는 시대라는 것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대라는 것도 중요한 몫입니다. 그 시대에 그런 만화가 유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런 문화적 공감대가 형성된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상업적으로 보증된 영역에서 팔리는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편집과정에서 더욱 많이 거론됩니다. 내가 생각한것과 전혀 다른 부분에서 히트가 되고 그것이 대 히트작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보면 참 놀라게 되지만 그런 영역이 가진 이해, 지지도, 대중적인 가치관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굉장히 작은 영역에서 바라고 있을 때에서만 해당되는 것이지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누구라고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상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혼자만의 공상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가지는 괴리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어린 마음에서는 그러나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사회적인, 경제적인 기준에서 볼 때 확실한 사회인이 그런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냥 철이 없는 바보개념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임관련, 출판관련 관리직에 속한 이들이 볼 때 게임을 잘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열정이상으로 그것을 가지고 논을 할 수 있는 기초스킬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게 됩니다. 다만 똑같은 스킬이라고 한다면 더 좋아하는 열정에 파라메터가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면접이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관련 회사 면접을, 유명 사립대를 나와서 경영과 철학으로 무장한 사람이 심사한다고 하면 과연 제대로된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논리적인 부분부터 실제 인간 대 인간의 면접이라는 것은 형식보다 그 현장에서 흐르는 분위기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는 점도 관과하지 않는 주도면밀함도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그냥 메뉴얼만 보고 달달 외운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포장할 수밖에 없지만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 주변에서 형식이라는 것은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만화를 권장할 때, "그냥 재미있으니까 봐" 라는 것보다 어떤 이유, 감상, 또는 기준이 될 수 있는 형식으로 추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요. 한 친구A가 친구B에게 "거기 음식 맛있어 가봐" 라고 해서 갔다온 B가 하는 말 "그 가격이면 그정도 맛을 내는 것은 당연하잖아. 너무 비싸!"라고 말을 합니다. A가 가진 경제여건과 감각에서는 그냥 맛만을 따진 것이지만 B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에서 맛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겠지요.

여기서 필요한 형식이라는 것은 맛에 대한 기준보다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여건, 가격적인 부분과 경제적인 여유, 그리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타이밍(친구랑 술먹다가 2차로 들리기 / 여친에게 프로포즈 하기 위해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과 목적 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냥 "맛있으니까 먹어봐"라는 것으로는 추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이 형식이라는 것에 너무 제약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곳은 1800원에 100g짜리 고기를 쓰고 저곳은 2000원에 80g짜리 고기를 써. 당연히 어느쪽에 더 가치가 있겠는가?' 라는 것이지요. 더불어 만화문화랑 비교를 하자만 "100만명이 보고, 재미있다고 알려진 작품이야, 그러니까 재미가 있는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어?" 라는 것이지요.

10만명이 보고 재미있다고 말을 하는 작품은 그 가치가 100만명이 보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만화보다 떨어지는가? 하는 식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추천이나 권장은 대부분 같은 영역에서 취미로움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취향이 존중되면서 이야기되어야 하겠지만 정작 그런 부분들은 대중성이라는 형태에서 조금씩 묻혀버리게 됩니다. 내 주관이 중요하기 때문에 남의 생각이나 취향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유치원 애들이 "이건 내꺼야 내꺼야" 하면서 장난감 밭에서 싸워더내는 꼴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누군가가 그것을 외롭지 않게 깨닫게 해주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 자체의 영역에서 나누는 커뮤니티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중적인 개념속에서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 아닌 쪽에 취미를 들인 사람들이 대중적인 표면을 가지고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자신의 심적표현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과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보면서 나누어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말한 인간의 자존성에 대한 밝기는 깨달음 이상으로, 1000Lux이상으로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대중이 가진 밝기는 대부분 100~200사이라고 합니다. 사실 대중이 100~200인데 무엇때문에 1000씩이나 되는 구분을 만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110에서 340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훌쩍) 인간이 그 영역을 그대로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것도 사실 어떻게보면 굉장히 따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 성인의 역역에 있다는 700~1000점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 대중과 같이 살면서 그것을 동화시킬 수 있는가? 등을 분포학이나 사회 통계학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존재가치관에 따라서 연결되는 부분이 오직 단일 점 하나로서 완전하게 구성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게 뭔소리인가 하면 100년을 사는 사람 인생에 최소한 5명 정도 그런 의식을 가진 존재가 있어야 그 영향을 받고 그에 준하는 패턴을 습득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1998년도에 조사된 한 인간이 만나볼 수 있는 인간객체(문화적인 영역에 속한 부분만)를 볼 때 약 2,300명 정도를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확률적으로 보면 5/2300이니까 그렇게 어렵지도 않는 수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5명의 성인급 존재를 어떻게 만나서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나름 문제입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경우일수도 있고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있어서 가족단위를 제외한 상위 50명 전후에서 그 영향력이 나탄난다고 하는데 얼마나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있을지도 생각해보면 구분 자체가 무섭지요.

'등급', 구분이라는 영역에서 보면 아라비아 숫자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 있지만 이것도 나라나 문화에 따라서 또 다릅니다. 누구는 1등을 최고로 치는 경우가 있지만 10단을 최고로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1-10단위를 보아도 1이 꼭대기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10이 최종단위를 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통괄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다만 그 영역내에서는 확실히 기준이 서지요. 바둑에서는 급수와 단수영역을 가지고 기준을 만들고 형식을 구분합니다. 그 기준치가 있습니다. 다만 큰 돈이 움직이는 프로스포츠에서는 승리라는 기준만 채워주면 형식에서는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형태도 보여줍니다. 팀으로서는 승리라는 기준을, 팀원으로서는 성적이라는 형식을 맞추어 나가면서 연봉협상등으로 자기 기준을 만들어가지요.

순정, 소년만화에서는 '사랑'만으로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개념을 완성시키지만 청년, 성인만화에서는 '결혼'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한 형식으로서 사랑을 이해하게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만남과 함께 이웃들이 거치는 과정을 가지고 얼마나 큰 기준을 자기에게 맞출 수 있는지 자꾸만 생각을 해보게 된다고 하겠지요. 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영역(감상적인 부분이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으로)에서 가족단위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홈드라마, 가족드라마, 그리고 부자간, 모녀간에 그려지는 관계를 가장 큰 단위로 보고 이후에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것을 가지고 성립되는 스토리를 만들어 갑니다.



사랑과 사건은 수많은 만화들이 가지는 요소이면서 거의 모든 드라마, 대중문화가 요구하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극적인 연출과 더불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에 빠져서 같이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지요.

인간드라마가 들어가는 작품들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성이 느끼는 감정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공략하는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사랑이라는 것도 있지만 가족으로서 그 캐릭터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도 있습니다.

개성과 개성이 복합적으로 대결하는 구성은 틀림없이 대립과 만남이라는 기()를 만들지요.

그리고 그것이 꼬이고 꼬이면서 더욱 심화된 드라마로 구성되면선 승(承)이 됩니다.

무언가 단락이 지어진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엉뚱한 방향으로 한 번은 흘러가서 전(轉)기를 만들더니,

어찌되었건 결과(結)를 만들어 냅니다.

굉장히 단순한 구성이고 결과이지만 가끔 보면 기와 전, 결이라는 형태로 드라마를 계속 이끌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으로 일반 사회적인 구성을 벗어나는 것이지요.

반면 이 반전현상을 너무 많이 보면 좀 거시기 해지기도 합니다.

한 번 보는 것과 달리 여러번 자주보는 경우도 생깁니다. 패턴은 유지하되 사건만 달라지는 것이지요.

결과가 달라지만 전혀 다른 작품으로서 완성이 되기 때문에 똑같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작을 가진다고 해도

결과가 전혀 다른 행동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는 잊어버린 것이지만 누구에게는 버려진 것이 되는 것도 있지요.

캐릭터,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그 기준을 만들어 보여줍니다.

대부분 용기나 돈, 지식 등을 말합니다.

누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누구는 없기 때문에 노력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누구는 가지고 있지만 모르고 있다가 잃어버립니다.

똑같은 드라마지만 그것을 가지고 논하는 사람들만 취미로운 논점일 뿐, 행복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말할 때는

'꼭'이라는 단어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1980년에는 금지된 것이라고 해도 2010년에는 가능한 경우, 표현, 구성이라는 것이 있지요.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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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글을 쓰는 저도) 만화라는 장르는 제법 짧은 시간동안 굉장히 많은 것을 가지고 표현하는 문화영역입니다. 게다가 상업적인 부분이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영역을 보여줍니다. 흥이날 수 있고 보는 사람들에게  이해만 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것이 동원됩니다. 오히려 기존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잘 조합해서 새롭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낼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지요. 가끔보면 편집(編輯)성향이 편집(偏執)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서 다른 작품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생기지요. 반면 시대변화는 크게 요건을 중요시합니다. 이런 요건이 가진 부분은 과거에는 무시되었지만 지금이라면 먹힐 수 있다는 요건이 생기는 것이지요. 특히 성적인 묘사라던가, 잔혹한 부분, 특정 분야에 대한 집착을 굉장히 시야를 좁여 연출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말도 안되는 연출이요 작품구성이었지만 정작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다만 대중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딱 하나, 얼마나 팔릴 수 있는 작품인가 하는 것, 그리고 팔린 수를 가지고 화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좋은 작품, 보는 작품으로서 재미가 있는가 하는 부분은 더 세분화 되어버립니다. 나는 보고 흥미를 느낄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너무 미세한 영역이기 때문에 흥미조차 안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실상 이것은 '만화를 본다는 영역'에서 볼 때 세분화되는 취향이기 때문에 소수문화권내에서 다시 소수문화로 구분되는 성향인데 대중문화권 기준을 볼 때 소수권내에서 나오는, 다시 세분화된 수수영역은 거론할 가치가 없는 흥미위주로만 이해를 하게됩니다. 다만 엉뚱하게도 소수문화권내에서 대중문화권에 미친 영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 소수영역내에서만 기준을 둡니다. 굉장히 지저분한 자기기준일 뿐이지요. 자신이 소수에 속할 때는 훌쩍이다가 자기보다 소수를 만나게 되면 으시대는 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구조론에 있어서 큰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가진 수적인 열세가 역전되는 현상도 가끔있습니다. 연애만화가 주를 이루다가 액션만화시대, 그리고 SF만화시대를 거쳐서 스포츠만화 까지 영역을 가지게 되면서 대부분 다른 부분이 있을 것에 대한 구분이 생깁니다. 다만 정작 불량청소년만화나 판타지 만화가 소수장르에 있을 뿐 대작, 진정한 만화영역에 들어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있었지요. 순정만화, 사랑을 논하는 만화에서 충동적인 감정만을 중시한 구성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득하게 보내오면서 느끼는 이웃사촌같은 느낌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는 또 예외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출판사와 그 작품을 모르는 대중은 '유행한다더라' 라는 소리에 따라서 관심을 가집니다. 유행을 하고 있을 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미 한발 늦은 대응이지요. 유행을 앞서 선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인 제작자와 편집, 판매부서의 야망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확실한 결과를 내놓은 것은 거의 1%대 영역입니다. 한국은 물론이요, 치열한 일본은 더욱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만화세계도 이런데 현실에서 1%와 99%라는 것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실입니다. (물론 99%를 가장한 23%나 54%도 있지만요)

대중적인 만화는 대부분 대중적인 기준, 논점, 그리고 가치관을 가지고 꾸준히 말을 합니다. 다만 소재가 바뀌고 캐릭터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주인공의 시점은 대부분 대중적인 독자입니다. 자립할 수 있는 생각의 여지가 넓어지면서 독자라는 영역에 만족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깊은 욕망의 애정에 빠져서 더 좋은, 더 만족시켜주는 작품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만나게 됩니다.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 한번 만족한 작품 장르에 빠져서 그런 장르 작푸만 죽어라 파고드는 경우지요.

다만, 뻔한 결과이지만 어느정도 그 장르를 파고들면 그 이상이라는 수준을 맞추어 나가기 어렵게 됩니다. 간략화 한다면 '무협지'가 그렇지요. 무술을 기반으로 한 정과 사의 대립, 그리고 그안에서 성장해서 위기를 구해낸 인간드라마가 '무협의 정통'이라고 하면 정형화된 규격에서 벗어난 존재, 또는 다른 협상상대를 가지고 주인공의 역경을 만들어내는 존재도 등장합니다. 그런 작품에서 보는 역경의 종류에 대해서 어느정도 만성이 된 독자는 조금 더 다른 환경을 요구하게 됩니다. SF나 판타지, 로봇, 마법, 동물, 비사회, 현실기준 등을 가자고 더욱 뜨거운 열정을 분출하는 경우도 보게됩니다. 나중에는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어차리 흥미위주이기 때문에 정의와 비정의에 대한 규정, 기준도 사실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먹고살기 위해서 살아가야하는 무술인에게 있어서 정의와 반대되는 사악함이라는 것도 특별하게 구분할 것이 아니라는 시선입니다.

미처 대중이 신경쓰지 못한 다른 부분에 대해서 그것만을 파고 들어가는 작품영역도 이제는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마니악 분야로 보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새로운 쾌감으로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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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문화, 서구문화라는 이야기를 하게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꼭 선진이라는 기준을 가지는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결과로서 번형되는 결과를 보게됩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화체와 만화체에 대한 논란도 과거에는 있었고 작품 구성, 연출, 채색방법, 흑백구성, 사용도구에 대한 논점도 사실 배워가는 과정에서 보면 어느정도 습득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구성이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실제 과거에는 '보는 작품에 대한 기준'을 보고 즐기는 작품에서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1970년대가 사랑한 캐릭터와 1990년대가 사랑한 캐릭터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묘한 것은 1970년대 15살 소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만화 캐릭터가 1990년대 15살 소년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라고 구분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소재나 구성, 연결점은 다르게 만들어지지만요. 사실 이 부분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100년도 안된, 짧은 역사를 가진 상업만화 영역은 기존 문화에 비해서 아직은 미비한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소재, 연출될 수 있는 기발함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흑백만화에서 컬러만화로, 종이만화에서 전자웹만화로 변화되는 것은 한 순간의 기준일 뿐입니다. 아직도 아직도 많고 많은 변화기준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이작품이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진정한 명작이라는 것을 탄생시키는 경우는 정말 정말 드뭅니다. 단순하게 100명 사회객체에서 10명이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데 그것을 10명 모두가 만족하게 만들 수 있기란 정말 정말 어렵지요. 그 10명이 모두 같은 나이에 같은 직업에 같은 가정환경에 같은 문화충족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지요.



그대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생활에 있어서 더 즐겁고 아름다운 만족을 알려줄 수 있는 작품을 찾고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도 더 좋은 무언가를 찾게되는데 그것이 한권짜리 만화일 수도 있고 한페이지 짜리 만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해가는 일만을 위한 감상적인 작품은 읽어가는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단계별 레벨을 요구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농담이라고 한다면 무협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협만화 1000권을 보게 하면 레벨 1개 올라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