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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 Story/Consol Game

Atari 2600 - 비운의 게임기


[Atari 2600] - 비운의 게임기

앞서 거론한 대중용 전자오락 게임 [퐁]을 비롯한 전자오락기 시장에 큰 바람을 일으킨 아타리는 1973년에 제작과 판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Kee Games라는 자회사를 설립, 관련 개발, 프로그래머들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런 시장 변화에 빠르게 호응을 해오는 일본에 지사를 만들었다. 더불어 1974년에는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도 이 개발팀으로서 입사했다. 스포츠 게임 '퐁'과 함께 대표적인 벽돌 깨기 게임 '브레이크 아웃'을 기반으로 라이선스 사업분야에서도 큰 수익을 낳게 된 아타리는 VCS라는 차세대 게임기를 기획, 개발에 들어간다.

단, 시장 자체는 커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개발 단계는 어디까지나 전부 처음 하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최초라는 단계를 만들어 개척하는 과정이다 보니 개발비용이 장난 아니게 필요하게 된다.

금융권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라고 보는 부분이 많았고, 실제 아타리가 진척시킨 수많은 기술(속칭 X파일 급 외계인 기술)들 중에서 세상에 나온 것은 극히 일부였다. 물론 이것은 시장성이나 현실 재현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없어지거나 사장된 기술인데 이때 기술을 ㅈ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차세대 기종에 적극 반영시킬 수 있었더라면 훨씬 낫은 시대를 만들 수도 있었다.

적극적인 투자를 받을 수 없었던 아타리의 금 용지원 정책은 이후 영화, 캐릭터 산업과의 연계성을 생각해서 유니버설 스튜디오, 디즈니 사에도 손을 내민다. 오히려 아타리와 게임 시장을 내다본 것은 '워너 타임즈'였다.

보도, 방송 관련 금액으로서 여유를 바라본 워너 쪽은 독자적인 유원지 개발 - 디즈니를 의식 - 과 함께 독자적인 게임센터, 아케이드 센터 계획을 수립했고 이에 아타리를 매입하게 된다. 1976년 2,8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워너가 아타리를 손에 넣고 기획하던 이 제품 아타리 2600을 1977년 9월 11일 발매하게 된다.

이 게임기는 엄청난 시장 진입 성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보급된 수 이상으로 손해, 경영적 손실이 큰 부분이 있어서 워너에게는 악몽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안이하게 발매한 소프트 덕분에 아타리 쇼크까지 일으키면서 말 그대로 폭망하는 수준까지 갈 뻔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만을 가지고 아타리 2600이 비운에 속한 장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시장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구자적인 입장에서 개발 의욕이 높았지만 시장 진입에 있어서 경쟁적인 인식이 부족했다고 평가된다.

즉 사회성이 결여된 개발자의 입자에서 개발만 했을 뿐, 그것을 시장에서 제대로 풀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으로서 이후 이런 인식과 사회적 인식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게임, 개발사는 말 그대로 너드(nerd)의 집단으로 보고 그것이 사회성에 비유되어 대중적이지 않은 비주류 활동에 집착하는 형태로 인식된다. 프로그램 기술이나 이해관계도 상당히 세대적 차이가 있었고 인터넷과 같은 형태를 통해 개인이 판매를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유통망 시장과 연결되는 과정에 있어서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너드를 소문자로 쓰면 일반적인 용어 해석이 되지만 대문자를 넣거나 하면 다른 의미로 중복 해석되는 일도 있다.

가장 높은 너드 인식률은 SF분야와 판타지. 그리고 경멸적 고정관념으로서 사교성이 부족하고 개인주의만을 따지는 인간형을 말하기도 한다. 한때는 그런 형태의 우상으로서 스티브 잡스가 거론되기도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사회에서 성공한 인물상으로 보는 경우에 한해서 발생하는 우상 문화이지만 말이다.

70년대를 가로지른 너드 문화의 대표성은 '운동을 못하는' 지성적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다수의 유통망을 구성하는 미국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이쪽은 대부분 체육계인데 반해 너무 이성적이면서 논리성만 따지는 집단과 만나서 일을 할 때는 당연히 충돌되는 부분이 많았다.

여기에 페어차일드(Fairchild) 사에서 나온 롬 카드릿지 식 게임기 [Channel F]와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게 되면서 유통시장에서 확실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게 되자 2600을 세상에 내놓은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은 책임을 지도 회사를 떠나게 된다.

- 참고로 아타리가 진행시킨 방식과 다르게 페어차일들의 롬 카드릿지, XY축을 기준으로 형성된 콘트롤러는 일본 시장이 이어받았다고 하겠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한 검토는 아타리에서도 있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개발 자체의 의미를 두는 것과 상품성을 생각한 방식에 대한 연결 방식에 대한 전환의 차이라고 하겠다.


농담처럼 나온 후속 2600, 위 사진에 있는 나무 장식이 빠진 속칭 다스베이더 버전(1980) 등을 포함하여 1979년에 폭발적인 시장 판매율을 기록하면서 큰 가치를 보여준다. 결국은 기본이 있었고 소프트 개발 - 게임 소프트 - 에 의하여 결정되는 시장이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인데 [팩맨]을 비롯하여 [스페이스 인베이더 : Space Invaders]라는 최고의 인기작을 출시하면서 약 4배에 가까운 매출 증가를 이룬다.

다만 생산성에 집착을 하고 초기 시장을 이끌어나갈 선도적인 게임소프트를 동반하지 못 했던 것, 유통망과의 마찰, 개발비의 낭비 덕분에 묘한 형태를 남기게 되었지만 게임기 시장에 있어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이후, 아타리는  1982년까지 200만 대를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큰 시장 성장세를 보여주었지만 자신들이 키운 시장을 자신들이 제대로 가져오지는 못 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개발사 타이토(taito)는 20억 달라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개발비용이 너무 심하게 낭비된 것 때문이기도 하다.



만보 주 

지금에 와서 아타리 하드웨어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담아 컬렉터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룰같은 것도 있다고 하는데, 마텔사의 가정용 게임기를 비롯하여 이쪽 제품군을 1세대로 칩니다.

2600이후에 나온 2700과 2800에 대한 이해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무선 버전이었던 2700이 실제로 발매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작, 개발기에 대한 전설은 꾸준히 있습니다. 컨트롤러 부분을 통함시킨 2800은 나름 개선점을 가진 제품이었지만 일본 닌텐도 브랜드의 패미컴이 출시되면서 확~~~ 잊히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게임, 콘솔 부분에 빠진 것이 주변 취미인들에 비해서 월등히 느렸던 만보는 이런 사실이나 기록을 주변 웬수들에게 주입식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을 알아서 어쩌라고'라는' 라는 심정이었지요. 실제 눈곱만큼도 재미없는 이야기였지만 게임 쪽에 사람 하나 빠트리기 위한 여러가지 효율적인 공략 방법 중 하나가 역사적인 구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해왔다 라는 우월성을 표출하는 단계로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타리2600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로 게임 1세대를 주장할 수 있다는 근거론에서는 확실히 가치가 높은 제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후 시대에 여러가지 전자칩, 회로의 통합으로 인해 게임 장르의 범람, 해적 소프트의 암약등이 더해지기도 했는데 특별한 가치관이 없었던 시절에 처음 만들어진 게임기로서 좋은 의미와 그림자를 동시에 가졌다는 점에서 의미를 둔다고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