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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xul Story

학문 : 學問 : Learning : Academia 의 가치


[학문 : 學問 : Learning : Academia]의 가치

지능을 가진 인류가 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유일하게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이 지식을 기록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밥을 먹고사는 것에 필요한 분야부터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 것까지 다 학문으로서 정의할 수 있게 한 것은 팽배하는 인구대비 직업, 활동기준의 남발을 막기위함이다.

다만, 그 학문의 연결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은 또 다른 의미를 둘 수 있다.

사람들이 그 학문의 가치를 단순하게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체재의 유지이념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만으로 간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전혀 다른 반대상황을 꾸며가는 것도 수없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가치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발전, 전개될 수 있는가는 그런 것을 얼마나 알고, 인지하는 가에 따라 다르고 그것은 수없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정리되어왔다.

물론 이 안에서는 오류도 있고 이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도 중요한 학문의 일이다. 그 학문의 초기관점에서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버리는 것은 당연히 기본적인 오류이지만 그것이 수정되는 경우는 굉장한 우연이 아니고서 어렵다는 인식도 가능하다.

실제 학문 그 자체가 세상을 많이 바꾸는 과정은 굉장히 느릿느릿하다. 급속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다른 연결결과에 따라서 나올 수 있다. 학문은 대표적으로 무력(武力)에 대한 반대용어로 사용되는데 실제 학문 그 자체가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특히 말살이나 압정의 수단으로서 학문과 문인들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간을 거쳐서 보면 그것들이 살아남아 거론되는 것은 그것을 인지한 사람들의 의식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지배자, 폭력적인 지배자들은 그런 의식을 없애고자 자기 편만들기에 열중하고 그와 함께 학문의 방향과 가치를 자신에 맞게 규정한다.

그것에 물들어 안정(安定)된 사회를 꿈꾼다는 형태로 정돈되어 버리는 결과론도 역시 학문의 하나로서 볼 수 있다.

의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결과가 없다는 점에서 학문은 수리, 수학과는 다른 모호함을 지적할 수 있다.

일반적인 수리에서는 1+1 = 2 라는 공식적인 절대 답이 존재하지만 문학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비이성적인 논리비약이 수도 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장난으로 인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이해력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논변(論辯)과 함께 웅변(雄辯)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도 지금 시대의 재미있는 모습이다.

학문이 가치를 가지려면 그 의미를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재를 두게되는데 본래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 이것은 종교를 통해서 간단하게 알 수 있다. 기본 논리는 같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이해력과 전파과정에 있어서 얼마나 변질되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학문과 종교가 동일시 된 적도 있고, 그때문에 과학과 수리가 적대시되는 과정에 있어서 문리와 수리가 대립되는 형태로 논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의 문화가 영향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겠다. 오히려 이간질을 하는 몇몇 이익단체의 논리때문에 구분을 늘려갈 뿐이고, 학교가 몇몇 이익기관의 수입, 재원으로 전락하게 된 이후부터는 논리와 문학의 정체성은 다른 부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보 주 

간단히 이해를 한다면, 학문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학문을 누가 이용하는가에 따라서 다른 방향이 나온다. 그것이 종교, 정치에 많이 이용된다.

그래서 과거 현인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아는 것이 힘이다."

알아야 이용당하지 않는다.

단, 그게 교육제도를 통해서 얻는 것보다 일상생활이나 취미를 통해서 알게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