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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xul Story

영상 작품들이 보여주는 이야기

실질적인 가능성을 본다면 허구에 입각한 드라마보다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 훨씬 더 대중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

그것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판타지나 비현실보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일상을 구성하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에 있어서 꿈, 상상력, 미래에 대한 바람이 어느 정도 대중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면 그 작품 세계 성향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그래서 근래에는 SF나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부분은 극영화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자주 바라볼 수 있게 된 현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미지들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억지로 따진다면 좀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요.


그렇게 본다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험, 비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 세계는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많이 거론되어 왔습니다. 영상기술과 작품 표현, 상상력만으로 대중에게 어필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 대중의 관람 수준, 이해 능력이 그만큼 향상되어있기 때문에 제작 측면에서도 그런 점을 쉽게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 소비층이 적절한 형태로 어레인지 된 부분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지 직설적인 이해관계를 바로바로 이해하고 이야기 진행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한국 등지에서 사는 취미인을 기준으로 할 때 아무래도 지적 수준이나 교육 환경에 따른 평가가 아닌, 일반 지식과 이해관계에서 여타 기준보다 좀 특출나게 다른 부분을 소재로 삼거나 이해를 어렵게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심리상태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그런 사회적 경험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정도가 전혀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종이나 사회적 편견에 입각한 드라마가 여타 나라에서 받아들여질 때 전혀 다른 이해를 받는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한동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은 오락적인 요소라는 형태로 많은 부분들이 그냥 무시되어 왔습니다.

2012년 전후까지만 해도 인터넷, 공적인 표현으로서 거론되던 여러 가지 방법적인 구성이 비판적인 시선으로 재평가되어야 하는 경우도 이제는 일상의 모습으로 전환되었으니까요.



사실, 이런 부분은 수많은 이들의 증언, 이야기 속에서 거론되어 왔고, 그것을 단순하게 시대의 추억으로만 기억하는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부분이 올바른 모습인가를 알아보는 수단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역사와 기록, 진실과 허구라는 점들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요.


가장 많이 거론되는 판타지는 폭력과 성적 유희에 대한 이해관계이고,

현실은 가정과 사회의 문제를 표출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이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준이 물질적인 것인지 심적인 것인지 다시 한번 되묻게 됩니다.


열정을 기반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나 구성이 80년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시대에 있어서 단순무식형 열정 인물이 성공하는 스토리를 만들기란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실력, 인지능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배경이 없이는 성공이나 해피엔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드라마까지도 이제는 어느 정도 개연성과 논리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갑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신기한 감성으로 막장을 지켜보면서 웃었지만 계속해서 같은 패턴만 반복되면 사람들은 흥미를 잃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많이 바뀌는 것이 개연성, 그리고 합리적 이해관계에 따른 상황분석입니다.


과거에는 악당이 있었고 그 악당은 나쁜 짓을 합니다.

그로 인해 주인공과 정의의 세력은 악당의 나쁜 짓을 막고 정의로운 승리라는 결말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패턴은 얼마 가지 않아, 왜 악당이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게 되는 방식과

그 나쁜 짓의 배경에는 정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우리들의 일상이 함께 했다는 것을 공감하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현실에서 평가할 수 있는 정의와 악의 상징적인 가름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일반적으로는 관람, 구독자의 관점)를 기반으로 한 평가가치의 일반화가 이루어집니다. 작품의 절대가치가 평가되는 기준은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얼마나 부합되는가에 따라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1980~90년대 작품들을 대략 떠올려보면 성적 표현에 대한 자유로운 연출과 구성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기 보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중심을 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적 행위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관음적 요소와 사회의 모럴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말하게 되니까요.

또한 그 대상자, 주인공과 피주인공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해 요소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도 또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장르 구분도 이제는 남성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게 된다는 농담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과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클리셰 같았던 부분도 이제는 다시 생각하고 접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일상 지식을 바탕으로 타인의 습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표현을 가지고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특출한 무언가가 되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과거의 오류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단순한 카피캣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만 따진다면 한국을 기반으로 향후 10년 정도는 가치관의 혼돈과 함게 이해관계가 어떻게 상충되어가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비주얼 소설이라는 평가가치도 사운드나 영상, 움직임을 포함한 간이 동영상 체험 드라마의 구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하겠지요.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일상적인 표현보다, 왜곡된 카메라 렌즈로 보는 구성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일상에서 정보를 확보하는 것보다 만들어진 영상으로 인해 기억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일상에서 이해되기 편한 구도가 언제까지나 일상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현대적인 평가 기준에 예술적 가치관이나 완성도가 높은 구성보다도, 흥행성적이 평가의 전체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제작자, 제작사, 프로모션 업체로서 본다면 당연하게 결과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유행하는 웹툰 시장도 다양한 플랫폼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자랑하지만 결국은 팔리는 작품에 중심을 두게 된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시장 성향에 따른 여러 가지 분석을 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된 작품보다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진 작품이 훨씬 더 크게 성공의 가치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형태로서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빅데이터 분석이 꼭 일반의 오류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지요.


결국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고, 기록만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냥 기록, 평가가치의 일반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그것을 평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런 오류에 빠지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직접 경험하고 만나보고 들어보고 즐긴 후에 자신의 감성으로 자신이라는 존재가 만들 수 있는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 같습니다.


2017년 사색하는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책들이 보여주는 사회적 가능성과 미래를 꿈꾸면서 써둡니다. 대략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봐도 좀 오랜 시간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하신 분이 아니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 풀어쓰자면 또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