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旅行 & 趣味/Japan

추억으로 돌아보는 일본여행 part D


일본미술의 호쿠사이(北斎)

2005년 일본에 갔을 때 우에노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혹사이 北斎 호쿠사이 전 작품을 전시하고 있더군요그의 작품 중 절반 가량이 유럽 미술관에서 보관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없는 시간을 내서 관람을 했습니다.

정말 당시대를 대표한 대중미술 작가답게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선보였는데 시간이 없어서 레조네를 겸한 카탈로그를 사오지 못한 것이 좀 가슴에 남습니다(워낙 줄이 길어서요 시간이 생명인 해외 여행자들에게는 이런 점들이 아쉽습니다). 한 번 보아둘 기회가 있다면 꼭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지금 일본이 아시아에서 신비로운 국가로서여행명소로 인정될만한 많은 이미지를 유럽에 심어준 작가 활동상은 정말 대단하지요어떻게 보면 근대까지 연결되는 만화적인 표현에 대표성을 부여한 예술가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게됩니다.

근대 동서양 미술부분에 있어서 무척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한다면 역시 이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통칭 호쿠사이는 대단히 놀라운 인물상을 보여준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은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풍속화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고전 일본 이미지를 고정화시킨 유명한 인물이지만 호쿠사이가 1760년부터1849년까지 생존해 다양한 그림들을 선보일 당시그 존재가 일본 미술계에 있어서 빛나는 별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서양문화와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던 에도(江戸)시대 문화를 직접경험하지 못했던 서양인들에게 일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지만 그 결과는 이후 세대에게 이어질 때까지 알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물론 더불어서 너무 깊은 판타지를 보여주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호쿠사이는 생애 3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가쿠삼십육경 :富嶽三十六景을 비롯해서 호쿠사이만화 北斎漫畵와 같은 대표적인 우키요에(浮世絵 한국 풍속화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대중적인 부분을 그리고 보급된 형태)’를 선보였던 인물입니다.그가 그리려고 했던 목표는 삼라만상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으로 목표했고 덕분에 93번이나 이사를 하고자신의 호를 30번이나 고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진 대표적인 호는 春朗’, ‘宗理’, ‘葛飾北斎’, ‘畵狂人’, ‘戴斗’, ‘為一’, ‘’ 등으로 그가 이렇게 다양한 호를 가지게 된 것은 대중에게 인기가 생기면서 늘어난 제자들에게 호를 팔아 수입을 얻었던 것으로 지금은 이해되고 있습니다.

또한 93번이나 이사를 한 것은 물론 모든 사물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하루에 3번이나 이사를 단행한 일도 있다고 하니 상당히 특이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더불어 주변환경과 그렇게 어울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나옵니다)다만 이사 편력에는 그림에 집중하다보니 방이 더렵혀지고 너무 더러워져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사를 감행했다는 말도 있습니다또한 90세까지 장수를 한 것에 비해 식생활이 무척 불규칙 했다는 점에서 기력(氣力)이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사실 호쿠사이가 활약한 우키요에는 상당히 대중적인(조금 비속적인 부분도 포함해서부분에 속하는 것으로 당시를 지배한 판화(版畵)나 육필화(肉筆畵)에서도 걸출한 능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키요에와 삽화부분에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마련한 활약이 일본보다 해외에 끼친 영향에서 큽니다덕분에 더욱 그 이름을 빛내어 자포니즘 ジャポニズム이라고 알려진 일본문화전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본래 수출되던 일본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된 호쿠사이 그림이 서양에 알려지면서 그 선명한 발색과 원근법 표현과 더불어 음영에 대한 묘사에 대한 인상은 서양미술사에 강한 인상을 가지게 했습니다고호(인상파)를 비롯해드비슈 가 호쿠사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 놀라운 결과를 발생시켰지만 정작 호쿠사이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는 호쿠사이만화(北斎漫畵)로 불리는 그림책을 다수 발표하면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대중적으로 다량생산이 가능한 판화부분에 높은 영향력을 미쳐 그림기술이나 서민 교육분야에 높은 공헌을 했습니다그가 주로 활약한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사람들 일상생활이나 풍물들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지금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다색판화(多色版畵)를 비롯해서 붓그림을 지칭하는 편이지만 풍속화(風俗畵)라는 일면도 가지고 있어서 고급문화라기보다는 대중적인 팝아트 계열에 속하는 구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호쿠사이 그림이 서양에 수출되는 도자기의 완충재용 종이포장지로 사용된 것은 일본에서 흔해빠진 잡종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 것을 통해서 서양미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당시 일본 에도에서 손쉽게 볼 수 있었던 그림이 서양에서는 극히 신비로움에 가득 찬 동양문화의 정수(精髓)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경우였고 이후 동서양 미술사의 정리 작업을 거쳐서 그의 영향력이 알려지면서 호쿠사이 이름은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서 입장을 확고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본인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비록 단순 명쾌한 스타일이라고 해도 그 섬세하면서 잘 꾸며진 터치감은 가히 놀라운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 당시 정치 때문에 인쇄문화에 제약이 생기면서 그림이 잘 퍼지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물론 호쿠사이는 그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활약을 펼쳐(몰론 당시기준으로 보면 불법대중에게 어필했지만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시기와 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여행을 통한 다양한 소재를 찾아낸 그는 말년활약하면서 자신이 가진 관능적인 시점에서 그림들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고 이후 수많은 일본미술관에 큰 자취를 남긴 그의 그림들은 지금도 일본 찻잔상점에 가서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본풍속도로 남겨져 있어서 일본을 방문하는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친숙한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 우키요에는 기본이 판화이기 때문에 많이 찍어졌고 당시를 대표하는 신문과 같은 곳에서 삽화로도 사용되는 등 수많은 활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호쿠사이 생전사후에도 많이 이용되었지만 정작 그가 창작한 3만점이라는 작품 수는 괴인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덕분에 무수한 우키요에 작가 중에서 그의 공적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99년도판 잡지 라이프(LIFE)’에서 선정한 1천년동안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세계의 인물 100중 유일하게 일본인으로서 선정된 장본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849년 510아사쿠사 자택에서 90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던 그의 일생은 대단하기 그지없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 그 그림들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다시 일본에 역수입되는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또한 가장 고전적인 일본문화를 알려준 기준을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인식을 선보여준 형태로 정리되었지요때문에 이후 일본만화 표현에 있어서 그 매력을 논하는 과정에 꼭 호쿠사이의 표현력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더불어 우리가 현재 쓰는 만화 漫画라는 표현을 대중적인 형태로 인식시킨 높은 가치를 가진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유명작품 중 부악삼십육경은 46장으로 구성되었고 부악백경 富嶽百景은 후지산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진 스케치북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입니다. ‘호쿠사이 만화 北斎漫画는 전 15권짜리 책자로 나왔는데 사용된 그림이 4000장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고 놀란 것은 <팔방봉황도 八方睨鳳凰図>인데 판화가 아닌 육필화로 21평정도 되는 천정에 그려진 봉황을 통해 표현된 그림입니다다만 이 녀석 전체를 보는 것과 부분을 보는 것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연출해 보여주는데 이런 부분도 18세기 일본문화의 한 편을 뛰어넘는 표현의 대가라는 것을 인식시켜줍니다개인적으로는 워낙 보기 어려운 해외소장 판화와 그림까지 전부 모아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 행복한 매력으로 작용했는데 당시 2만엔 정도 하는 레조네(raisonne)를 전부 구입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쉽게 생각합니다하루 이상 들여서 볼 가치가 있는 전시회를 단 4시간 만에 다 둘러보려고 한 것이 문제였지요그의 그림들은 현재 각 지역 미술관에서 보관중이라서 그 작품들을 전부 보려면 정말 어렵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또 있으면 가보고 싶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