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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tion Story/2010 / 21c

전설의 오따쿠

우리나라를 말하는 기준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따쿠, 오덕, 취미를 중심으로 한 이해관계라는 것은 여러가지를 말합니다.

특히 이런저런 세대를 거쳐서 만들어지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체는 대부분 소문이 소문을 불러서 이해되는 오해인 경우가 많고,

애들 기준에서는 대부분 쓸데업이 유행하는 몇몇 사이트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지식기준을 만들어갑니다.

소위 2013년 9월 현재를 기준으로 연령이 10대 중반, 후반인 사람과 20대전반, 중반, 후반인 사람. 30대 중반, 후반인 사람. 40대 전반 중반 후반인 사람. 50대 초반 중반인 사람. 60대 초반 중반에 있는 취미인들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보았습니다. 비공식적인 입장도 있어서 이것이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한 증명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부산, 대구 지역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번째. 그들은 왜 전설인가?

대부분 1980년대를 전후로 한국의 오덕적인 취미문화의 대중성을 이야기하게되는 것은 사실(FACT)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한국 사회 경제의 발전기를 지나서 성장한 세대가 자아를 가지고 즐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2013년에 이야기를 해보아도 1970년대 이전과 80년대 이후의 기준은 완전히 바뀝니다.

물론 통신문화를 비롯하여 1990년대는 인터넷 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인식문화가 있지만 여전히 1980년이 한국 취미문화의 큰 변화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통해서 취미영역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1960년대의 기준이라고 하면 '공부'라는 것은 대부분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성공이라는 기준에서 공부를 통해 입신양명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정치적 수단으로서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이었지요.

서양식 경제사고가 한국사회에 급격하게 도입된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를 거쳐 성장한 과정 안에서는 대부분 경제와 물가지수의 변화가 16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지금 시대는 10년 단위로 볼 때 약 2~4배 정도의 물가, 인식, 경제적 변화치를 말한다고 하는데 50~60년대의 변화는 그 일반적인 수치의 4배나 됩니다.

이것은 지금 시대 기준으로 제대로 판단해볼 때 빈부격차를 비롯하여 사회적 인식의 차이를 확산시키는 기준도 엄청나게 틀리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서울,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와 산간 시골의 인식차가 크게 일어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정신을 차린 청소년, 야망을 가진 이들은 모두 서울로 몰려드는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지요.

순수한 서울출신 (최소한 2~3대 이상이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온 세대)은 200만이 안된다고 했을 때, 1960년대 당시 580~740만에 달하는 인구집중현상을 보여준 서울지역은 굉장한 혼돈기를 보여줍니다.

각 지역출신 사람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경제적 여유를 위한 생활을 시작합니다. 공단, 공장, 사업, 서비스 관련 업종에 있어서 굉장히 다양한 문화적 충돌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이후 여러가지 사회적 갈등구조의 기반이 됩니다. 또한 정치적 인식도 여러가지 갈래를 보여주는데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던 미국신봉, 맹신에 가까운 개신교에 대한 집중현상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환경여건 개선이라는 결론으로 그 가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본래 한국에 있었던 신분차이에 따른 차별, 구별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적 주체가 된 세대의 등장은 대부분 신규문화산업과 더불어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는 시대를 만들어줍니다. 노동집약산업시기로서 1990년대후반와 2000년대 초반에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그와 비슷한 것을 간접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여기서 보면 1970년대 있었던 한국 사회현상을 1990년에 들어서 돌아볼 때 중국, 중앙아시아의 변화로 회고할 수 있듯이 일본문화가 한국을 바라보는데 약 10~20년 정도의 인식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앞서 이야기한 1980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 이전에는 해적판 대본소 만화방과 전자오락실이 불량청소년들의 온상으로 큰 지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네마다 당당하게 존재하는 서민경제의식 속의 하나였습니다. 불량식품 퇴치운동의 양(陽)적인 부분은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음식문화의 정착이지만 음(陰)적인 부분은 기입적인 대단위 공산품 시장의 확장을 위한 탄압이자 자본주의 우선의 경제적 차별이 시작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대부분 동네 장사를 막고 신용을 할 수 있는 대단위 식품에 대한 이해관계인데, 이것을 실제 지금 시대의 시선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하게됩니다. 오히려 식품영양학적인 부분으로 볼 때 제조시간의 단축이나 하루 활동량에 필요한 칼로리 섭취라는 기준에서만 충족을 시켜줄 뿐, 영양학적인 부분이나 그에 따른 화학재료들을 장기간 인체에 섭취할 때 좋지 않은 결과가 있다는 것은 무시했던 것이지요.



그런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기준은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준을 잡는 것인데 1950~60년대는 경제적 부흥여건과 함께 먹고 입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의 충족, 의식주 기준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이 알고 있다시피 인간은 먹고, 자고, 입고 만으로 만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요건이 서양문화의 중심에 있었고 이것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유희 였습니다.

그러면 1980년대 당시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유희라는 것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대부분 시, 그림, 영화, 음악 을 말합니다.

영화는 TV전파시대를 거쳐서 대중문화의 총체적 예술이라고 말하는 TV프로그램 시대를 엽니다.

다만 1970년대를 비롯하여 한국은 자체적인 콘텐츠 생산능력이 무척 미비했습니다. 하루 평균 6~8시간 방송을 위한 프로그램 생산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해외 콘텐트를 구입해와서 채우는 것으로 대부분을 연명했다고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한국 영화, 방송계는 대부분 일본식 문화인식 단어와 사회경제 통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대중적으로 상위신분을 말하는 기준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즉, 사회적 신분으로서 볼 때 영어, 불어와 같은 서양언어를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하이 클래스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를 말합니다.

속칭 '인텔리 : インテリ' 이지요. 이 단어기준은 역시 일본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본래 육체노동계급과 대비되는 지식노동계급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앞서 말한 공부를 통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기준을 말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드라마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송미디어에서도 '인테리하다'라는 일본식 표현이 대중문화의 기준으로서 사용됩니다.


이러한 기준은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서 여러가지 예술, 방송, 건축, 산업기반에서 꾸준히 일본식 표현이 사용되고 있고, 그중에서는 실제 서양문화에서 온 단어를 제멋대로 부른 지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고급 산업용어로서 남아있게됩니다.

덕분에 1980년대는 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문화수교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접근해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경제기반에서 일본은 소니와 혼다와 같은 세계적 브랜드가치를 창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당연히 그것이 바로 동양 선진국의 미래이자 기준이었습니다.


1970년대를 거쳐서 1980년대에까지 한국방송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아동용 출판시장 - 특히 교육문화 시장 - 들은 정식 계약이 아니라 배껴서 들고와 장사하는 방법이 당연한 시대가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보면 [마징가Z]나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가 우리나라 산업 제품이 아니라 일본 프로그램을 그냥 들고와서 더빙을 하거나 무단 복제해서 출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회 경제구조에 있어서 대부분의 대중이 그냥 보고 즐기는 문화아이템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는 선진구조론을 떠들면서 사회정치기반의 개혁을 꿈꾸는 인간으로 볼 수 있었던 이들과 달리 문화적 속박, 자유경쟁기반에서 활동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시대가 바라보는 따라하기, 모방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창피하다는 생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양문화 기준으로 '다이얼식 전화기'가 아니라 '보턴식 전화'가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말하고 있을 때,

한국은 대부분의 경제문화에서 이제 막 다이얼식 전화기가 보급되고 있는데 누군가는 지금 세계는 다이얼식이 아니라 보턴식, 교환전화가 아니라 다이렉트 통화가 가능한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똑같은 1980년 1월 1일을 맞이했다고 해도 다이얼식 전화기를 손에 잡아보고 감동하는 서울 A씨가 있었을 때,

서울 B씨는 디지털 다이렉트 전화기와 컬러TV라는 것에 집중을 하고, 막 나온 대중형 컴퓨터 PC라고 불리는 물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 경제적 요건에 따라서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1980년대.

대중들은 한국어판 '마징가Z' 주제가를 열심히 부르면서 응원가로 사용하고 불법장난감들을 가지고 놀면서 이것은 한국의 문화라고 생각할 때,

마징가 Z는 사실 일본산 만화, 애니메이션,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자의 타의에 의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는 지식층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경제적 여유를 두고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많습니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있어서 환경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지면서 사는 것은 하찮은 일이니까요.

 

지역적인 차이가 심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경제적 문화적 교류협력 관계가 정확한 방침을 정하지 않고 민간기업이나 개인들의 관계만으로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수많은 주부들이 일본에 놀러갔다오면서 '코끼리표 전기밥솥'을 사오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대를 보면 말이지요. '소니 워크맨'은 오히려 정식수입이 아니라 밀수입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일본산 소니 브랜드의 워크맨을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과 삼성 워크맨 마이마이만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이들의 인식차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서울이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과 부산지역이 일본과 가까워서 전파를 잘 잡으면 바로 접할 수 있다. 라는 점은 여러가지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부산지역에 가면 그 사악하고 퇴폐적인 일본방송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문제시했으니까요.


아무 생각없이 살던 한국 소년 소녀들이 새로운 문화적 유희를 느껴가던 여러가지 소년잡지, 신문, 프로그램 대부분은 (약 91%정도) 일본산 콘텐츠를 베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1990년 말까지도 한국은 한일문화교류가 정식화되면 문화침식에 의해서 한국문화가 살아남기 힘들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일본문화를 한국에 직접 가지고와서 접근하는 것을 꾸준히 말렸습니다.

1980년대 말까지도 한국미디어와 방송들은 '미친 젋은 것들이 일본 아이돌이나 일본 문화에 빠져서 허우적이고 있다' 라는 발언을 공식적으로 했습니다.

더불어 대본소 만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일본산 콘텐츠를 무단으로 베껴서 장사해서 살아왔던 자신들의 현실은 무시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세상의 인식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키우고 성장시키면서 공부시키던 교재나 학습지의 대부분이 그냥 일본 문화를 따라하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여기에 앞서말한 단어 인텔리 = 지식계층이라는 것은 공부를 해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서) 더 높은 지향성을 가진 인물상이 있었기 때문에 고능력, 고수입을 가진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인식이 가능했기때문에 남들(대중)이 모르는 것을 아는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요건 중 하나이지요.

이 부분은 1880년대부터 꾸준히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우월심'으로서 타인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큰 기준을 차지합니다.

대부분 인쇄와 산업혁명기를 거쳐서 넓게 전파되는 지식의 대중화, 교육문화의 발전기를 거쳐서 공립학교의 성립(이것은 1+1=2 라는 같은 인식을 더 넓게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 반면 쓸데없는 대중의 인식을 세뇌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도 거론됩니다)으로 인해 구구단과 같이 '누구나 아는 것'이라는 기준을 말하기도 했지요.

다만 이미 1970년대부터 일본은 이런 대중교육, 공립교육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습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어려움이 있어서 1950년에 625사변, 한국전쟁을 맞이합니다. 일본은 한국이 식민통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1945년 8월 15일부터 전쟁 패망의 잔재 속에서 새로운 변화기를 가집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이라는 부분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약 5년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데 그 사이에 큰 경제, 인식, 사회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봤자 겨우 5년차이라고 말을 하지 모르지만 이 차이로 인해서 실제 한국과 일본의 문화, 경제적 인식 차이는 약 20년차이를 보이게 되었다고 말을 하지요.

특히 독재정권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대를 거쳐서 진정한 민주화 시대를 이루었다고 하는 지금에 있어서도 세대별, 지역별, 그리고 감정과 인식별 차이와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일반적인 대중과 다른 접점을 가질 수 있었던 지식이 있었습니다.

1000명중 998명이 TV에 나오는 마징가는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알고 있을 때, 그것이 일본산 애니메이션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벌써 큰 차이였지요.

아직까지도 대중의 인식은 '미국산, 일본산이 좋아' 라는 기준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국산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없는 사람, 또는 대중이 사용하는 것이지요. 있는 집은 미국산 화장품, 일본산 전자기기를 가져다 놓는 것이 바로 사회 품격의 기준으로서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미국산 문화(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는 서양경제문화)의 일환으로서 맹신하던 시대의 잔재이기도 하지만 세계경제의 중심에 있는 미국문화에 대한 접근과 반발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올바른 인식보다 나쁜 녀석들이 아니라는 상대적 인식을 가지게 합니다. 이 시대의 나쁜 녀석은 북한, 그리고 일본입니다.

지금 시대의 인식차이도 누가 더 나쁜 놈으로 보이는가? 하는 것인데 198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대중의 인식은 북한이 제일 나쁘고 다음이 일본입니다.

그 나쁜 일본문화를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렇지 않다고 공식적인 주장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일본산 문화 아이템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볼 때 터부시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독자적인 한국문화의 성장을 위해서 미국산 문화를 따라할 것인지 아니면 같은 동양인 사회를 거쳐서 전파되는 일본산 문화를 인식하는 것이 편할지는 지금과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한자문화권에 여러가지 문화적 기반이 비슷한 일본산 아이템은 접근이 쉽지요. 여기에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시장은 말 그대로 일본이 아주 놀라운 수로 증폭합니다.

199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시티헌터], [북두의 권], [드래곤 볼]과 같은 일본산 만화책을 불법해적판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그것이 일본문화라고 말을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통신권을 비롯하여 몇몇 인텔리(?)들은 그것이 일본것이라는 알고 말을 합니다.

대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문화적 인지차이가 심한 상황에서 일본산 아이템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문화적 상위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우월함을 느끼게 하지요.

대중이 모르는 것, 먹고 살기 바빠서 그것에만 치중하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문화적 정신적 유희에 시간과 돈을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기준이 바뀌지만 '학생'들이 유리합니다. 교육을 받고 성장하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은 그런 시대와 함께 자신들의 인식범위를 넓혀가는데 그 중 하나가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이라는 문화였습니다. 물론 대중문화로서 음악, 영화, 소설 등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말 그대로 같은 문화영역이면서도 '대중문화'에 속한 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있어보였지요.

일본산 영화나 음악, 소설, 시, 전자제품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텔리 스럽게 보이지만

일본산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게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잡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기억하는 여러가지 이야기 중 하나는 같은 일본산 만화, 애니, 게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점으로 인해서 전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쪽 동네에서는 마징가가 일본산 작품이라는 것이 당연한 기초지식이지만

그것이 어떤 연유로 인해서 제작되었고 왜 그런 모습을 하고 방송을 하게되었는가? 라는 부분과 함께 기계공학, SF, 사회적인 오컬트 붐에 대한 인식까지 가지고 평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 = 오따쿠라는 인식을 한국에서 가지게 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아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중 분류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유흥적인 부분에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단어로서 오따쿠가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와서 보면 경멸, 경시, 일반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부적격 인간에 대한 단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1980년대 취미영역에 속한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오따쿠'가 조금은 자랑스러워 해보일 수 있는 계급인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많이 봤다, 많이 경험했다 라는 대중적인 기준을 더해 볼 때 전설이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있는 척 할 수 있었고 그 영향을 받은 이후 세대들도 있어보였습니다.

1990년대 말까지 취미영역 문화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경험의 차이와 인식의 차이로 인해서 전설아닌 전설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하겠지요.


1980년대에 페라리라고 하는 자동차에 엉덩이를 걸쳐보았는가? 포르쉐라는 자동차의 핸들을 잡아보았는가?

하는 기준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의 문화적 가치관에 속해있습니다.

이동을 한다는 목적을 볼 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중에서도 버스(전철)를 이용한다 와 택시를 이용한다는 역시 신분차이를 만듭니다.

그 대부분의 가치는 같은 시간을 소비하더라도 얼마나 경제적 가치관이 다른가 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동하는데 1시간을 소비하고 200원을 소비하는 대중교통보다

30분을 소비하고 1000원을 소비하는 택시를 타는 사람의 인식은 그 30분을 아끼기 위해서 5배의 경제가치를 소비할 수 있다.

즉 그 정도 경제소비를 해도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어서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다라는 말을 하게됩니다.


부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동수단에 있어서 더 빠른 것과 더 안전한 것, 더 쾌적한 것.

이 선호되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따른 가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습니다.

빨리 죽고 늦게 죽는다는 차이도 있고 병이나 사고등의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일반적인 평균수명시간을 볼 때 60살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1980년대 기준으로 볼 때 과연 '얼마나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여 그것을 자신이라는 존재를 사회에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고기준에서 볼 때 한국은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대, 즉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를 준비기간으로 보고 (근래에는 전문교육기관을 포함하여 고등학생 시간대까지를 보는 경우도 많아졌지만요) 그때까지 소비되는 시간대비 인식에 대한 차이를 말하게 됩니다.

똑같은 대학 4학년 졸업자의 나이, 연령대를 기준으로 볼 때

사회지위(명함에 적혀있는 지위), 수입, 인격적인 수준은 틀림없이 많은 사회적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교양(敎養 : culture)'이라는 기준이 등장한 것은 대부분 야망성취를 위해서 개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품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말합니다.

그 중 대부분은 문학, 경제, 미술, 그리고 사회적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도를 말하게 됩니다.


뭐 간단히 말해서 소속된 사회단위 또래들이 가장 많이 떠드는 화제거리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어른들은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잘 사귀라고.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는 것은 지금 2013년 현재까지도 당연하게 통용되는 사회 상식 기준입니다.


학생신분에서 사회인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있어서 얼마나 인간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가? 하는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직사회, 기존에 만들어진 사회에 적응하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학생신분 내에서 사회에 진출하는 방법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창업을 비롯하여 다른 분야에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려고 합니다.

배우고 알고 이해하는 가치를 달리하는 경우지요.


8세부터 20살 전후까지가 일반적으로 인간이 배우고 이해를 가지고 자신을 형성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시기로 봅니다.

그런 시기에 남들보다 더 빠른 시기에 사회적 지위와 명성, 경제적 풍족함을 이룰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가치관은 말 그대로 선망의 요건이 됩니다.

단, 그 방향과 소속은 서로 다릅니다.

춤추는 아이돌에 빠질 수 있고,

연기하는 배우에게 빠질 수 있고,

음식을 만드는 요리인에게 빠질 수 있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빠질 수 있고,

아름다운 시를 만드는 시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고,

즐거운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충성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있어서는 늦은 시기에, 당시 청춘기였을 때는 그런 문화가 없었거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쳐온 것이었지만 이후 알게되고 그것에 심취하게된 고연령 취미인들도 있습니다. 어느정도 사회적, 경제적 인지도 높은 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넓은 영역을 보면서 다양한 개성을 보여줄 수도 있지요. 분야별 취미문화의 인식에 있어서 젊은 나이에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인식과 활동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젊을 때 알게되는 짧은 인식과 비교할 때 나이가 들어서 가지는 것, 또는 나이가 들어서 까지도 계속하는 취미문화는 대단히 좋은 인상을 받게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작을 하거나, 또는 그것에 심취해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여건에서 볼 때 지금 시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유희, 만족감을 통한 현실에 대한 불만해소 등으로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단체이건 불만만 늘어놓고 주절거리면서 사회비판적인 의견만을 말하는 것은 오따쿠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삶에 더 풍족한 즐거움을 영유할 수 있는 사람이 오따쿠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기준이겠지요.


그러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그것이 전설이고 사회적으로 달리 보는 시선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전설은 같은 시기에 1+1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2+2, 또는 구구단을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선망, 또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계에 종사한다고 오따쿠는 아닙니다.

관련 취미를 많이 했다고 오따쿠는 아닙니다.

일상적인 오따쿠는 그냥 사회대중과 달리 자신의 문화 자체에 속박된 불쌍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정적입니다.

사회, 경제적인 의미로서 볼 때 소수경제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소비층이지만 실제 그것의 대부분은 뻔한 대중인식을 바탕으로한 판매전략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뿐인 철부지라는 것이 맞다고 하겠지요.




2번째. 왜 취미와 문화는 다른 것일까?

앞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지만 결국 그 시대의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넓은 것을 보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1980년대의 생각, 사고가 2000년대의 인식과 다른 방향이나 의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취미일까요?

피와 살이 되고 돈이 되는 부분이 그럴까?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만화책 덜 보고 게임 좀 안하고, 애니메이션 좀 모르고, 장난감 안 만들고, 영화는 보는 장르만 보고, 음악은 대중 음악 차트에 올라오는 것만 듣고, 베스트 10에 올라온 책만 보는 것이 취미문화인가? 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냥 죽은 체로 취미를 한다고 말하겠지요.

보통 한국사람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시용해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저기 다른 곳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서 식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의 식사이지만 그것을 꼭 그것만으로 식사를 해야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으로도 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 식문화권에서는 그 나이프와 포크를 기반으로 한 식사방법과 요리가 기반이 되어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그쪽이 더 편하고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지요. 때문에 식문화에는 대부분 그것과 함께 동반되는 여러가지 부수적인 문화적 가치와 기준이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완고한 지식문화 체계에서는 자국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더불어 다른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반목되는 사항을 꼭 만들지요.

대부분의 문화적 영향력은 그것을 우월하다고 입증하는 방식과 더불어 그것이 현실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가?

에 따라 다르게 판단을 합니다.

1980년대 초반을 거쳐서 90년대에 이를 때 일본에서도 오따쿠 산업이라는 말을 따로 쓰지 않았습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소프트웨어 관련 산업과 부수적인 수입경로는 대부분 캐릭터 사업, 머천다이징, 영상소프트, 출판산업의 장르 중 하나로서 인식되어 있었지요. 장난감 사업만 해도 캐릭터 판권을 중심으로 한 이해를 가지고 접근을 했지 그것이 따로 연결되는 특정 취미인들의 취향에 맞는 사업분야로서 별도의 인식기준을 가지고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A라는 사람이 어느날 많은 이들이 하고 노는 바둑알을 가지고 '알까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바둑을 알고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대중적인 인식을 볼 때 바둑알과 바둑판은 바둑이라고 하는 지적유희를 기반으로 한 고급문화를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저급스러운, 애들 장난같은 알까기를 하는 것은 다른 접근이지요.

그런데 과연 알까기는 바둑이라는 큰 문화 장르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요?


고전적인 역사의식에서 볼 때 바둑이라는 장르는 문화적 장르보다는 전쟁의 전략 전술 연구에 있어서 동반될 수 있는 지적 유희. 상대를 이겨서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지적 스포츠영역에 속한 취미영역입니다. 실제 먹고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취미는 아니었고 대부분 사회적으로 상급계층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지적유희능력을 자랑할 때 보여 줄 수 있는 기준으로서 바둑을 이용했습니다.

더불어 그런 수요를 가진 이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상류에 속한 소비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요구하는 비싼 고급감을 맞출 수 있는 다양한 산업적, 경제적 가치 기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싸구려 알이나 판과 달리 비싼 고급재에 대한 수요나 경제적 기준은 굉장히 큰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독서라는 기준은 대부분 그것을 통해서 얻는 인간의 지식량, 감동치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하고있지만 중세시대를 거쳐서 근대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회적 인식을 볼 때 고서, 장서, 판형이 아주 틀린 고급감 넘치는 책자들을 책장에 늘여놓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 부와 권력에 대한 기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 책들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있어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보여주는 연출을 위한 무대예술, 장치, 인테리어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무식하더라고 똑똑해보이고 싶어하고 그런 사회계급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배우지 못한 상인 출신이 자신의 집안에 품격이 넘치는 서재를 만들어 놓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지요. 대부분의 취미문화 영역은 과거, 있는 계급에 속한 상류층들이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중적인 전파문화를 거쳐서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서 새로운 속성을 부여받습니다.

100만원짜리 바둑알과 바둑판이 기준이었던 시장에 어느날 대중적인 생산력을 갖춘 새로운 10만원짜리 제품이 등장할 때, 그것은 대중문화로 전파될 수 있는 기준을 새롭게 만들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대부분 산업혁명기를 거쳐서 의복과 주택, 그리고 식량에 대한 생산성 증가로 인해서 새롭게 추가될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요리를 즐긴다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섭취한다는 기준이 일상인 사회에서는 같은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생활로 볼지, 문화로 볼지, 또는 취미로 볼지 나누어집니다.




1990년이라는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라는 가까운 나라경제여건을 보아도 금세 알 수 있지요.

가장 빠른 경제적 여유를 갖춘 일본, 그것을 따라가는 한국, 사회적 체계와 인식자체가 아직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중국이 같은 1990년을 지내면서 변화합니다.


고층빌딩이라는 것은 대부분 한정된 지역내에서 더 많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론입니다.

실제 과거에는 더 넓은 영역에 세워지는 것이 더 높은 생산성과 부를 충족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국가들의 알력도 대부분 이부분을 가지고 충족시키고자 싸우고 있었지요. 높은 것과 넓은 것은 지금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인식에 있어서 계층을 구분하는 방법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많은 것'은 절대적인 가치로서 어느 영역에서라도 통용되는 기준이지만요.

다만 초기 접근법을 볼 때 영화산업은 이런 원리에 속하지 않았는데 대부분 그 산업적인 가치보다 기술적인 발전에 따른 대중의 인식, 또는 의식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꾸는 것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시와 소설, 그림, 음악은 초기 의식주 영역에서 속한 삶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계급과 대중의 변화, 전파에 따른 기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A 동네 야만인과 B동네 야만인 단체가 있습니다.

A는 싸움만 할 줄 알았고 B는 농사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A는 B랑 싸워서 B의 부를 빼앗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A는 싸움기술과 전쟁기술에 가치를 보게되었고 B는 더 높은 생산성과 더 확실한 수요예측을 하게됩니다. A에게 바칠 것도 염두에 두고요.

기본적으로 A는 전투계급으로 발전을 하고 B는 농민, 생산계급이 됩니다.


지금 문화적 인식에서 볼 때 싸움 잘하는 것이 더 높은 생산력을 가진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고대 사회의 계급, 상류층, 지배계급의 존재가치는 더 잘싸우는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똑똑하게 싸우는 인간으로서 가치증명이 바뀌기 까지 여전히 절대적으로 야만스러운 폭력은 왕권을 만들고 지배층의 무분별한 수입기반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잘 싸우는 이들에게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제도가 생깁니다.

반면 노래와 글, 그리고 즐길 수 있는 거리는 여전히 지배층이 피지배층에 대해서 배풀 수 있는 조건으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이것을 잘 분해해서 보면 써먹을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경시하던 취미영역 상권이 실제 세분화되고 악화된 경제에 있어서 새로운 수익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인식의 변화를 가집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의 대부분은 몇몇 의지를 가진 문화적 가치론이 아니라 생계의 수단, 그리고 공부만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를 쌓아야 하는 사회생태에서 벗어난 가치를 보여줍니다. 공부도 못하고, 특출난 능력을 가지지 않고, 먹고살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분야 중 하나였지요.

고대 원시인 기준이라고 하면 먹고 싸워서 살아남는 능력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먹고 살 수 있는 기준을 충족하고 시간이 남게되는 순간부터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게됩니다.


사회를 이룬 인간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고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의식주 등급을 올리는 것과 함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의 개선,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통해서 나라는 인격이 어떤 형태로 보이는 지에 대한 관심기준을 바꾸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합니다.

만일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이 전부 선남선녀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못생기고 추한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화장술이 발전을 했고 그에 따라 더욱 예뻐지고 고와지고 아름다워지려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한 산업, 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먹고 살고싶다 라는 일차적인 요건을 갖추기 원하는 인간 1세대.

먹고 살게되자 또 다른 것을 찾게되는 인간 2세대.

왜 먹고 살게되는 것 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점에서 보면 행복의 조건, 만족도를 논하기도 하지요.

더 많은 문화취미생활이 가능한 사회보다 그냥 단순하게 먹고사는 것만에 충실한 사회에서 행복만족도가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문화와 취미가 어떤 기준을가지는 이유 중 하나는 대중성, 숫자놀음입니다.

1000명이라는 인구가 있을 때 10명이 즐기면 취미이지만 100명이 즐기면 문화가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 인지의 차이로서 '그것을 안다 모른다'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은 문화가 됩니다.

몇몇 소수가 록큰롤 음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취미가 됩니다.


알고있다 만으로 취미와 문화가 되는가?

라고 하면 또 다른 것이지요.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향유하는가 하는 부분이 생기지요.

대부분 문화가 되는 경우는 그것이 대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즐기게 되는가? 하는 점에서 전파력을 중심으로 광고, 홍보, 전술적인 기획능력이 많이 거론됩니다.

가장 유명한 방법은 미디어매체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가지 매체, 수단을 통해서 A동네 사건을 저멀리 Z동네 꼬마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줄넘기, 구슬치기, 잣놀이 같은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놀이문화의 한 영역으로서 장르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놀이의 기준에서 장비적인 추가가 이루어지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숨바꼭질은 몸과 장소만 있으면 되지만 줄넘기와 구슬치기, 잣놀이는 말 그대로 도구가 투입됩니다.

새로운 시대의 영역을 가진 놀이문화이지요.

다만 이것은 모든 이들의 사회적 인식에서는 놀이문화이고 그 도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접근하게 되면 취미가 됩니다.

그래서 그 도구를 바꾸어 가면서 놀이문화의 세분화를 추구하지요.


바둑알과 바둑판은 바둑이라는 지적놀이문화에 속한 것이지만

같은 도구를 가지고 알까기를 하면 취미가 됩니다. 문화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그 도구 자체가 완전히 알까기용으로 새롭게 개발되고 완성되어 많은 이들이 즐겨야 겠지요.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은 전부 기존에 있던 고유문화권에서 파생된 장르입니다.

완전하게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장르가 아니지요.

때문에 여전히 기존 대중문화 영역에서 어떤 큰 위치를 가지고 기준을 가지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TV애니메이션은 TV프로그램에 속한 일반적인 장르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특히 아동프로그램영역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요.

극장 애니메이션은 일반 영화 장르에서 표현되는 한가지로 봅니다.

방식이나 구성은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듯이 기존 영상매체가 가지는 방법, 기술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이것들은 기존에 있던 방식을 널리 알려서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화면을 통해 보는 즐거움을 알게된 후에 나온 방식이지요.


만화, 일러스트와 달리 칸만화로서 가치를 가진 것을 볼 때 사실 만화책은 여타 기준보다 문화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높은 장르입니다.

게임은 기존 놀이문화에서 전자오락, 전기를 기반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전달방법이 새롭게 발전된 형태로서 문화라기 보다 기술로서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후 전자오락이 장르로서 큰 경제요건을 충족시켜주면서 문화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게 되지요.

이쪽은 기존에 있었던 문화적 요소가 새로운 기술을 만나서 신규 장르로서 구분된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석적으로 보면 대중의 인식에 더 넓게 알려지고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에 없던 영역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에 따라서 문화가 되고 취미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다만 이렇게 말하면 또 다르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취미문화' 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3번째. 사물과 인식의 재발견

대부분, 문화와 취미의 영역은 하나로서 보기에는 어려운 기준이 많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많은 이들이 즐기는 것'. 그 사회에서 인식할 수 있는 대중적인 가치관으로서 문화가 있지만 그것이 취미문화로서 보면 다른 인식을 가집니다. 그 사회 객체가 가진 의식기준으로서 통용되는 것으로서 '즐길 수 있는 문화영역'에 속하지만 그것이 그 사회를 대표하는 가치로서 증빙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또 어렵습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해서 오따쿠, 오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본다고 해서 오따쿠 오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따쿠 문화'라는 것은 대부분 그것을 기준으로 형성된 경제적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적인 가치를 말합니다.

때문에 공짜문화로서 불법으로 다운받아 보고 하는 것을 가지고 오따쿠, 오덕의 문화, 가치로서 보는 것은 어떤 부분에서도 통용될 수 없지요.

사회적인 경제가치를 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취미문화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음악, 영화, 시, 소설, 건축, 게임 등 어떤 것들도 다 그것이 동반된 경제적 활동과 가치가 함께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문화로서 기준을 보여줍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있습니다.

'맥도날드' 라는 이름을 보거나 듣게되면 많은 사람들이 패스트푸드, 체인점포, 햄버거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가치기반이 확실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브랜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물론 동네 아저씨 이름이 맥도날드 인 경우라도 조금 다르겠지만요.

 

'코카콜라'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탄산음료, 마시는 음료로서 여러가지 음식들과 조합해볼 수 있는 경험과 함께 소비되는 돈의 가치 이상으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애플'만 보면 맥킨토시 같은 기존 PC(IBM호환)과는 다른 영역을 개척한 것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삼성'이라는 명칭만 보면 종합상사, 한국 제일기업, 여러가지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LG'는 IT관련자들에게 제법 많이 보는 것, 모니터를 비롯하여 특징적인 몇몇 장르제품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애플' '삼성' 'LG'

라는 명칭을 동시에 보면 근래에는 대부분 스마트폰을 떠올립니다.


인식과 브랜드의 가치관은 상당히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단일적인 가치관과 더불어 연상되는 다른 경우도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초기 오따쿠라는 표현이 사회적 경멸의 표시로 알려지는 이유가

방구석에 '캐릭터 피겨'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굉장히 다수 소유한 사람에 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파남이라는 일본산 드라마에서 보여준 대표성있는 모습이었지요.

외형적으로 우울한 기준에 널리 알려진 인식의 기본이었습니다.

이후 오따쿠는 사실 이런 것이다 라는 식의 대중인식론이 파생적으로 발달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구석에 이상한 캐릭터 인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오따쿠의 기준으로서 넓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사회심리적 요인으로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오따쿠의 '증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브랜드 인지력과 함께 집착한다. 를 중심으로 퍼진 오따쿠에 대한 인식은

좋아한다. 즐긴다 와 동급으로 취급될 단어가 아니지만 

좋아하는 행동범위 안에서 집착한다가 포함되는 것으로 인지하고 봅니다.


그 때문에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 오따쿠다

라는 인식이 한동안 크게 퍼졌고 그 기반도 굉장히 많은 오해의 원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라이트 유저와 하드유저. 소비자의 심리로 볼 때, 더 많은 투자와 소비를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로서 그것에 집착하고 파고들어가는 심리적 요인을 말합니다. 이유나 구성은 다르다고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고 파고들어가는 행동은 사실 어느장르에나 다 존재합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감정이 될 수 있고, 요리에 대한 열정, 자기 개발에 대한 열망,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복충족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다가 시나리오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글 쓰는 것을 해보다가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게임 오따쿠일까요?


최종적인 결과물에 속한 사회성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 사람들 중에서도 10명이면 다 같은 방향으로 이해하는 기준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게임을 하는 것이 좋아서 게임을 즐기다가 나도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고 프로그램을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가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을 개발하여 명성을 얻게됩니다. 이 사람은 IT인으로서 취미인이 아니고 게임을 즐기는 오따쿠가 아닐까요?

 

속성적인 면을 볼 때 방송인이라고 해서 취미를 즐기는 부분에서 그 사람 개인의 성격이나 인격적 가치가 새롭게 판단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배우라고 할 때 배우라는 사회적 가치는 있지만 그를 잘 알고 지내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음악을 좋아해서 악기를 연주하는 문화인으로 봅니다.

작곡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발표해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사회에서 배우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관련 직종에 있는 사람을 100% 관련직종에 관심을 두고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연쇄살인마 같은 형태를 갖춘 경우도 쉽게 보지요.

이 사람의 낮시간대에 속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원으로서 그를 기억하지만 밤의 사건을 알게되면 인식을 달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사람을 인지하고 그 행동과 가치관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경우는 표면적으로 들어난 모습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그 사람이 속한 사회성이나 행동, 문화적 소양, 일반적인 행동에 대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그 사람, 개인의 오해나 편견 등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A라는 매체가 '김씨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발표하면 그것을 믿고 이후 김씨는 나쁜놈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은 A라는 매체가 김씨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발표를 해도 그것만 믿지 않고 B라는 매체, C라는 방법 등으로 알려진 다른 것도 찾아보게 됩니다.

더불어 그 매체 ABC가 어떤 기준으로서 그런 판단을 하는지도 생각을 해보지요.

 

단, 이런 인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냥 죽어라 A가 하는 말, 이야기만 믿고 자신의 가치기준을 만들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판단이나 가치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남들이 그러더라, 친구가 그러더라' 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더불어 A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게 된 이후에는 절대적으로 B와 C는 반대로서 의미를 부여하지요.


때문에 실제 정상적인 이해관계와 사회인식을 가지고 보면 말이 안되는 현상이나 이야기도 자신이 가지는 판단기준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바뀝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는 것이 적은, 좁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 여전히 좁은 시야 안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넓은, 아니 일반적인 시야와 판단기준만 갖추어도 일반인과 취미인, 그리고 오따쿠라는 장르적 구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생각이 없이 그냥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 인지력보다 주변 환경에 따라서 생각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왜?" "어째서일까?"

라는 기본적인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훈련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라고 하겠지요.


가장 큰 기준으로서 왜 지금 우리들은 2013년이라는 단위와 24시간제도를 사용하고 있을까?

금전을 비롯한 세계통화, 사회적인 관습들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인문사회에서 볼 때 서양사고와 문화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 통합된 기준을 가지게된 이유나 원인, 사회적 가치의 변화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환율차이가 발생하는 것인지, 문화적 지리적 풍토차이와 지역에 따른 혈족사회의 존재가치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단순하게 배우라고 해서 배우는 표준어와 외국어.

표준이라는 가치는 대부분 그것이 가장 많이 통용되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대부분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행동, 그것이 싫어서 반발하는 경우. 그것에 대한 논리적인 자기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공부를 하기 싫고, 일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철부지들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과 같은 취미에 빠지고 심취하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철부지가 오덕인가?' 라는 부분은 다른 것입니다.

사물을 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맞다 틀리다라는 이유로서 확인시키는 것은 대부분 개인들의 목적에 따른 구분이 있습니다.





4번째. 유행과 성장의 전설

실제 자신들이 속한 사회, 단체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그것만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속한 정체성은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가? 라기 보다 그것들이 주는 '즐거움'에 주요 의식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만족을 하고 맙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섹스겠지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이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육체적 만족감만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것만을 목적, 판단기준으로서 보고서 행동을 하게됩니다. 유치하다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성적 매력을 가진 외모를 가진 이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관계나 구성은 굉장히 일상적입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몇가지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경우도 봅니다. 말 그대로 패턴화가 되어서 뻔한 모습을 한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고 성적욕구를 분출하는 경우이지요. 이런 경우는 대부분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이나 인간 본질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수 있는 부부만을 요구하는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성적 매력의 기준은 시대의 변화에 땨라서, 그리고 지역, 문화의 기준에 따라서 많은 판단을 가집니다.

영화를 볼 때 장르에 따라서 볼 것과 보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요.

나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보고 즐길 수 있는 부분에서 대해서 만족하고 싶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를 보여주는 영화만을 본다.

이것은 말 그대로 내가 그것을 위해서 돈과 시간을 소비하는 만큼, 행복의 요구조건으로서 선택하는 영역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생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은 것이 아닌만큼 자신의 기준을 얼마나 화합시킬 수 있는 개성으로서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안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생활 자체가 그런 경우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자기 생활,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시키거나 포기하는 것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행하는 것에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자기본능적인 면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화제로 삼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자기 사회성의 합리화이지요. 속으로는 그 사회 자체가 가진 부조리를 까면서도 정작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척 그런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자기 합리화를 하지요.


대부분 영웅의 조건이라는 것은 모두가 가진 일반적인 방향성과 달리 진실된 의지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관철하는 비사회적인 바보를 말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영웅이지만 좋지 못하면 말 그대로 개죽음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또한 결과에 따라서 영웅이 되어 후세까지 거론될 수도, 시대의 악당으로 남게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철없는 사회인들은 자기 행동이 영웅적인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역학을 하면서 사회성이 짙은 카리스마로서 정착되는 경우도 있지만 쓸데없는 주접이 되는 경우도 있고 내성적인 사람이나 속이 깊은 사람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1+1+1+1=4 라고 말하는 것과

2×2=4라고 빠르게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이니까요.

때문에 2×2=4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왜 4라는 개수를 가지는 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방법과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습관을 가집니다. 왜 그런지는 참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않아요.

 

4라는 애는 오따쿠래.

그래 오따쿠구나.

오따쿠는 병맛이잖아.

그러니 4는 병맛이야.

 

라고 끝나는 대화 속에서 '4는 왜 오따쿠일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그냥 병맛이니까 오따쿠' 라는 말로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실제 오따쿠는 일본에서 사회적 통용상 존칭으로 사용되다가 순식간에 이상한(사실은 이 부분이 중요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는 녀석들의 인식용어로서 거론되고 이후 사회적인 경멸의 대상으로서 사용됩니다.

반면 그런 정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한국 취미인들 사이에서는 오따쿠라고 불리면 좋아합니다.

있어보이니까요.


여러가지 오류가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런 것이 굉장히 일반적인 논리, 이야기의 기본입니다.

왜 오따쿠는 병맛, 경멸의 대상을 포함하는 단어인가? 하는 부분을 말하기 전에 이상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는 녀석들이 벌인 사건 몇가지가 문제입니다.

대부분 일상 사회에서 보더라도 사회인지력이나 행동발달 장애같은 것을 가진 인간이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의 책임소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상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더라는 것 때문에 분석적인 요인으로서 거론됩니다.

일본 사회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사회가 인지하고 있는 일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살인, 도둑, 폭력과 같은 행동은 다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이상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해서 나쁜사람은 아니지요.

철학적인 기준에서 보면 타고난 성질을 떠나서, 그 환경적인 부분이 많은 인격형성 요인으로 보게되었지만 대부분 그 환경적인 부분은 가족, 부모와 생활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 나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본 것이지. 이상한 만화나 애니메이션 때문에 이상한 인간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해석으로서 관심을 받게됩니다.

더불어 무분별한 자유로 만들어지는 작품활동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론과 함께 여러가지 우려와 걱정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발전하는 큰 산업체와 미디어의 연결이 시작됩니다. 돈의 거래, 어른들 세계가 개입됩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그런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가 인정을 받고 상업적인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하자 급격하게 비판적인 견해가 사그러들고 일본문화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관계와 더불어 불황을 맞이한 일본경제의 한 축으로서 새로운 기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산업적 가치에 대한 우월성이 포함된 대대적인 의견이 교차되고 오따쿠로 지명된 특수 계층에서 통용되는 시장에 대한 분석이 들어가지요.


그런 시대에 들어서 한국에서는 기존에 있었던 우월한 용어가 아닌 병맛 오따쿠, 일본에서 알려진 첫 의견 그대로가 한국에서 알려집니다.

더불어 자기비판적인 오따쿠발언이 대단히 자주사용되지요.

단순하게 소수의 단어에서 더 넓은 이들에게 활용되는 것 같은 착각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좁은 세계, 좁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곳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판단하는 가치관, 세계가 좁기 때문이지요.

 

 

80년대와 90년대의 큰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세계화에 대한 열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동네 촌구석에서 통할 줄 알았던 녀석이 사실 알고보니 세계가 인정하는 녀석이더라! 라는 반전영화같은 이야기지요.

더 넓은 세상을 위해서 세상의 규격에 맞추어 가자 와

오리지널이 가장 진정한 가치관이니 그것에 세계를 맞추도록 이끌자 

하는 의견이 교차합니다.

실제 세계정세를 알고 연구하고 그에 적응하는 방법과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방법이 크게 대두되지요.


사실은 그 두 방법론이 다 같은 말이지만 그런 것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다른 방향인 줄압니다.

세계에 알리고자 하려면 그세계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세계가 모르는 것을 알게되지요.

결국 그 세계가 모르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 그것이 세계화인데 무조건 세계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아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따라하는 것으로 세계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나보다 못한 후발주자에게는 있어보이게 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 후발주자가 자신을 추격해왔을 때 자기 개성이 없는 존재는 그냥 평범한 세계 중 하나가 되어버릴 뿐이지요.


물론 뻔한 이야기입니다. 세계를 리드하는 선도자가 되는 것은 그만큼 여러가지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에 필요한 부분을 가지고 공부하고 연구하며 자기개발을 해나가는 것은 필요하지요.

왜 그런 결론이 대중화가 되었는지 알게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방법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사람은 1가지 방법만 알고 있는 사람에서 2가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만 보던 문화인에서 만화도 보는 취미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돈을 버는 직장인으로서 살면서 만화와 영화를 즐기는 취미인이 되고 그 세계속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성도 없이 남들이 하는 천편일률적인 말만 떠들어대는 인간은 그냥 나이나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설적인 취미인, 전설의 오따쿠가 되고 싶다면 우선은 일반인이 되고 그 일반인을 넘어서는 자기를 완성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정도도 못하면서 '오따쿠는 말이야.....' 하는 식으로 포장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지요.


오따쿠가 일반인 코스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일반인이 오따쿠 코스플레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사용된 이미지들은 다들 조금씩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