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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c Story/Adult

즐거운 만화감상과 비평 (12) - 한없는 것과 부질없는 것

만화는 즐거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에 나오지만 그 것 때문에 재미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몇 몇 출판, 편집 관련 일을 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들었던 소리가 있습니다.

단순한 이야기이고 현실의 법칙이라는 부분인데 작가 자신이 즐거워 할 수 있는 행복한 자기만족형만화가 있고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기술을 습득하고 그 안에서 다시 조금 더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에 도약을 하면서 결과물을 창조하게 된다고 합니다. 소의 말해서 천재 형 작가인 경우, 천재적인 감각보다도 그 만화 작품 안에 작가 스스로가 몰입되어 살아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작가가 가지는 마음가짐이면서 그 세계 안에서 작가 스스로가 울고 웃고 행복하고 나락에 빠지고 부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입이라고 하겠지요.

 

이런 부분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잃어가는 작가도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해외 유명 작가가 어떤 계기, 어떤 형태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몰입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 저도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서 그 부분에서 멀어지는 부분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은 만화를 그리건,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가는 과정은 여러번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모 작가의 경우, 마감과 체력에 밀려서 팍팍 늙어가는 모습이 보이면서도 입과 얼굴은 웃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장면을 행복하게 그리고 있었거든요.

그런 부분을 볼 때 몇 년 만화를 그린다고, 몇 십 년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그런 감정을 잊어버리는 작가라는 것은 작가로서 살아가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화가 가진 가능성보다 만화를 그리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작가가 있고 그런 만화가 꼭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좋아하는 독자를 위해서 그려질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 있어서 저는 한국과 일본, 미국, 그리고 프랑스 만화출판시장을 조금 알고 있습니다. 작가나 출판사, 시장에서 즐겁게 보는 아마추어 비평독자들 모습을 본 적이 있고 그 안에서 다시 한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만화작품의 토양이 가지는 환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양면(兩面)화된 독자들의 세계와 철없는 위장독자(僞裝讀者)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굉장히 어려운 판단을 하게 만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만화를 그리고 싶은 이들은 많습니다. 실제 '먹고살 걱정이 없이' 라는 조건이 붙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에헤헤 거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말하는 미치광이요, 세속적인 부분과 떠나서 자기만족이 주는 세계에서 영원하게 왕을 하고 싶은 철부지의 표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만화작가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 돈이 되지도 않고 배가 고파도 만화를 그리고 싶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독자들의 관심이 다가오건 말건 계속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작가로서의 기술이나 능력이 부족한, 남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굉장히 어색한 작가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과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자기 말만 하고 자기혼자 만족하고 자기 생각만 밀어치는 형태는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존재로 보이지요. 그런 것 때문에 실제 독자와 열정을 나누어 갈 수 있는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부드럽고 조화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작가의 완성이라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화지망생이라는 친구들을 볼 때,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도 보게됩니다. XXX라는 작가를 아세요? 라는 말을 듣고 안다고 했을 때 나온 이야기가 그 작가가 성공한 방향과 그런 모습을 동경하고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독자들이 많이 많이 사랑하는 작가라서 행복할 것 같다는 느낌보다 그가 성공한 그 모습 자체에 대한 동경을 느끼게 되었지요. 개인적으로도 그만큼 그림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표현력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작 만화자체를 어떤 형태로 사랑하는가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결국 만화가로서의 꿈은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럴 것 같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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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만화작가들이 가지는 작품구성에는 다양한 모습과 성공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그냥 에헤헤 하면서 만화를 즐기는 입장에 있을 때는 그런 부분까지 다 보면서 즐기는 형태는 아니지만 가끔 어떤 장면, 어떤 구성 등을 보면 에헤헤~ 웃으면서, 아니면 또 우어어어~ 하면서 훌쩍이고 있을 작가 얼굴모습이 머리속에서 떠오르기도 합니다. 정말 단순한 이야기지만 껌 딱딱 씹어가면서 건들건들한 폼으로 눈물 펑펑 쏟아지는 명장면을 그려내는 작가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괴기한 작품을 상상도 못할 폼으로 만드는 작가라는 것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제 상식과 이해능력 상에서는 그 이상되는 존재를 볼 수 없었지요.

 

한없이 보여주고픈 자신의 세계와 그 세계가 타인, 독자들과 잘 소통되는 연결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만화작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표현되는 기술이겠지요. 남들이 알아볼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논리로 제멋대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보다 누가 보아도 어떤 의도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감정선을 보여주는 작가의 기술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끔 보면 그런 점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단순하게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볼 때, 예쁘게 그린다는 것보다 잘 이해가 되는 그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안 글면 만화작가들의 호불호가 단순하게 그림 하나만으로 저평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만화작가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도 필요한 능력이 창조하는 힘그리고 그 창조된 세계를 잘 보여주는 힘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림이라기보다는 스토리,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소설또는 원작가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소설, 스토리 라인으로서 만들 뿐 그것을 현실적으로 잘 보이는 만화구성으로 만들어낼 힘이 없습니다.

같은 원작을 가지고 수많은 영화감독, 배우들이 다르게 연출하고 보여주는 것만큼 만화작가들은 그들이 가진 개성으로 그것을 표현합니다. 모방작가가 아닌 이상, 표현력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보여주는 능력과 더불어 그림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작가의 연출이요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캐릭터를 그린다는 것 이상으로 많은 감동을 주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중, 노래라는 것은 인간 본연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사람 앞에서 보여주는 감동이라는 것이 있지요. ‘라이브는 더더욱 큰 느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보는 이들에게 깊은 매력으로 다가올 수있습니다. 물론 손뼉도 짝이 있어야 가능하듯 보여주고자 해도 그것을 보는 이가 없으면 보고 감동할 수 있는 기회는 없겠지요. 가능성이라는 부분들을 볼 때 일반적인 사람들이 만화를 보는 기회를 가지는 경우는 심심풀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이 더 많다고 하겠지요. 특히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 부분이 심합니다. 여가선용이나 취미문화로서 좋은 매력을 가진 장르로서 인정하는 것보다 비천한 애들만화 수준이라는 가능성이 강한 것이지요. 실제, 그런 부분에서 보면 현재 한국내에 있는 일본만화의 비율이 급상승한 것은 순수하게 아동, 소년소녀 만화 비중뿐만 아니라, 청장년 만화 부분에서까지 기존 한국만화가 가질 수 없었던 영역표시가 확연하게 들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웹툰 만화가 가진 조회수라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취미가 아닌 심심풀이일 뿐이지 여가, 문화로서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반면 천편일률적으로 기획되어서 나온, ~한 판박이 만화에 고정된 시선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정신을 못 차리는 형태는 아무래도 지향하기 쉬운, 그러나 결코 그런 상황에서는 뻔한 상황만 되풀이하는 아둔한 동물들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토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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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과 범죄에 대한 표현을 통해서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다시 얻어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해석을 독자적이면서 자극적인 이해력을 바탕으로 다른 관점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정의(情義 : 定擬 : 定意 : 正義)라는 것이 제법 많은 것을 말하지만 규격화된 정의와 남에 의해서 알려진 정의를 자신의 정의로 삼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적인 차원에서 사회질서, 규범을 이해하는 정도로 보면 됩니다. 근래에는 약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에서 완성되어버리는 윤리규범교육질서라고 하겠는데 사실 상 이런 구분은 과거 18~20세 이후까지도 정의되된 사회규범 교육이었지요. 근래에는 성장의 기준에서 빠져있는 정의교육이 단순하게 단계별 기초로만 생각되지만, 이런 형태 내에서 발전할 수 있는 독자적인 생각을 만들 수 있는 규범이라는 것이 실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상상속의 결과물인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미래를 꿈꾸는 마음에 미래의 모습을 미리 그려낼 수도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이 꼭 완벽하게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들이 상상해볼 수 있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만화소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인 부분과 더불어 독자들과 성장하다보면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 수도 있고 굉장히 소수만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흥행과 판매성적을 위해서 부질없는 것이라도 하고보는 경우를 봅니다. 특히 일본만화의 정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미소녀 캐릭터 & 성적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자극적인 연출 구도 및 표현력 상승 등은 일본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본의 세속적인 가능성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문화, 또는 만화 전체의 문화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리는 만화, 세속적인 가능성을 포함한 만화가 인기를 가진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포함하고 보는 것을 보면 참 묘한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부분을 가진 것으로 인해서 그 작가에 대한 판단이나 기준이 변화되는 경우도 종종있기 때문에 매번 여유를 두면서 보게 되지만요.

더불어 유럽, 미국 만화의 특징이면서 한국, 일본식 만화구성과는 다른 면은 역시 스토리텔링에 의한 구조적인 연출법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에 cf나 방송, 드라마, 영화 제작에 쓰이는 스토리 보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나중에 영상으로 만들 때 편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구성, 연출방법에 의한 표현력 확장은 중국은 물론이요, 여러 나라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특정적인 구도나 묘사를 꼭 누가 먼저 지향했는가를 말하기 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출했는가에 중점을 두고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어떤 포인트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겠지요.

연애만화라면 역시 키스나 고백하는 대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그리고 그에 따란 캐릭터의 심정을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가에 중심을 두겠습니다. 결정적인 대사는 아무래도 칸이나 시퀀스, 또는 구도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라는 대사가 시작될 때는 캐릭터들을 멀리서 잡은 후 점차 줌을 해가면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그리고 약간의 머뭇거림이 표현되면서 주변에 살랑이는 바람, 그리고 대사가 이어지면서 너를 사랑해라는 대사가 완성되는 순간 크게 떠진 눈동자로 클로즈 업되는 등으로 대사와 이미지가 연결되는 결합성은 해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연출 중 하나입니다.

반대로 클로즈 업에서 반대로 멀어지면서 표현하는 방법이나 중복되는 형태,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 서로가 응시하는 시선만이 교차하면서 연출되는 모습 등 다양한 이미지와 수단이 제각각으로 연결되는 모든 스토리들의 유형으로 정형화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 효과적인 대사만을 위해서 그림체가 바뀌는 경우도 볼 수 있지요.

반면 다이내믹한 스토리가 전개될 땜는 그만큼 독자적인 아이디어 구성과 더불어 연출되는 효과, 표현 등이 달라집니다. 만화 <베가본드>에서 작가가 수묵화 기법을 통한 새로운 연출, 액션 장면들을 만들어 나간 것은 초기와 달리, 작가 자신이 성장하면서 완성시킨 일종의 베가본드식 구성, 그리고 작가의 미()적 시선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라고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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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지금까지 주절거린, 만보가 보는 만화비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비록 어떤 특출나게 확정된 인정은 없다고 해도 만화비평은 그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때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은 과거에 이미 출시된,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작품들입니다.

다만 만화는 장르적으로 만화뿐만이 아니라 영화, 소설, 드라마, 음악,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와 접목된 형태에서 그 기준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더욱 심화된 전문성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전통적인 가치만으로 규정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전통을 유지한 가운데 현실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비평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화 이해력 수준 향상과 다양한 작품들을 접한 경험이 그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전통이라는 것이 가지는 가치를 확실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가 가진 기초평가기준도 변동하게 됩니다. 사회, 문화, 정치, 종교, 또는 유행 등에 따라서 민감하게 변화하는 것이 대중문화 예술영역에 속한 만화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유행어 등이 작품에 녹아들어가 있는 경우에는 그 당시의 사회현상이나 문화적인 이해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피겨스포츠 만화라고 하면 1970년대 만화가 3회전을 불가능한 영역의 기술로 표현하지만 2000년대 만화는 4회전 이상을 말합니다. 또한 문화적,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에서 규정된 가치관이 한국에서 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문화인식 자체가 완전하게 붕괴되거나 가치관이 완벽하게 바뀌는 경우 일상적으로 볼 때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그런 것이 가진 극명한 변화를 만화를 판단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기에는 무리한 경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적인 분야로서 인정되는 사회비판이나 질서붕괴 작품에 대한 정의는 소설같은 분야에서 예술적 가치로서 인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방식이나 소재의 신선함, 그리고 그것을 정의하는 형태에서 얼마나 가치있는 논리를 보여주는가에 따라서 그 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으로 칭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존 가치관과 평가 척도를 가진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관점을 비틀어버린 작품이 만화작품 내에서 성공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사회 관습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계도 있기 때문에 문화비판이나 종교적 색채, 정치적 이해론, 민족대립, 인종간 갈등, 차별된 사회 인식을 만화 자체에서 표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현실이 아닌, 비교할 수 있는 다른 현실로 바꾸어 표현하는 방식들이 많이 나옵니다. 덕분에 생각이나 지식수준이 덜 발달한 이는 그것이 현실에 대비되는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흥미위주, 오락거리로서만 보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락으로서 즐거운 만화는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즐거웠던 만화들을 비교하면서 평하는 것은 그만큼 그 안에 담긴 다양함을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특히 사회전반에 걸친 비평에 대한 기준은 굉장히 비평가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대립된 구조론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모두가 완전히 같은 사회를 지향하거나 같은 결과를 말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세상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요.

 

더불어 비평의 대상이 된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도 그 것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한 비평 자체가 새로운 사회적 변화나 시점, 인식의 차이에 인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비판이 될 수도 있고 비론, 논평이 되어서 완벽한 개인감상의 비평론이 나와서 정착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 비평사류가 한 가지 이상의 가치를 확실하게 논할 수 있게 된다면 그만큼 다양한 다른 생각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절대적인 장르별 가치기준이라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만화는 그림과 글이 더해진 종합표현예술영역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과 이해시키는 것이 대한 구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반대로 어색한 조합을 통해서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 간단히 말해서 a라는 작품을 보고 좋은 감상을 가졌을 때 그 작품을 비평가가 좋아하는 x라는 작가가 그렸을 때는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또는 같은 감상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을지 등을 비교분석하는 형태 -

실제 비평 자체가 창조하는 새로운 가치관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나중에 다른 비평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해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비평적 시점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 과거에는 비평기준이 1~3이었다고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서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 새로운 기준으로 들어서면서 비평기준이 1~4, 또는 1~5가 되어가는 것 -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고 완전무결한 정신지배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삶의 윤회 속에서 살고 있는 만큼,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이 생각해볼 수 있는 최고와 최저, 그리고 평균적인 이해논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그 빛나는 기준은 하늘의 은하수만큼이나 다양한 매력을 만들어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을합니다. 그런 빛과 빛의 충돌로 인해서 새로운 비평수단이나 평가기준이 나온다면 그것도 역시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있었던 관습적인 방법과 평가만으로는 순수하거나 완벽하게 평가되는 타당성 여부를 재정돈해서 다시 풀어나갈 수도 있습니다. ‘연애만화에 있어서 지고지순한 목적의식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독자에게 얼마나 공감시키는가에 달려있으니까요. 가끔 말이 안 되는 우연의 반복이나 뻔한 스토리전개라도 해도, 또는 과거 작품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다고 해도 그 안에서 다시 인간, 독자의 감성을 울릴 수 있는 세대적 비론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970년대 캔디에서 느낀 감정을 1990년에 꽃보다 남자에서 느끼는 감정은 세대적인 차이점을 제외하면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

 

개인적으로는 민족, 문명, 신화 등에 포함된 인식, 세계관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철학적인 구성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신을 믿는 것, 신에게 구원을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습이고 법이며 체계//입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설정한 세계와 신이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세계, 그리고 신과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세계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라는 것이지요. 또한 신적 존재를 통한 인간사회에 대한 다른 감정을 보여줄 수 있게 만들어가는 것은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합리적 결과, 권선징악을 연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신에게는 절대적인 이성(理性)을 기대하게 됩니다.

 

경외(敬畏)로까지 표현될 수 있는 완벽한 이성, 또는 절대적인 능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하고 행복한 삶의 영유와 같은 경지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 아름답기만 한 삶, 꿈꾸는 듯 행복하기만 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고자 만화책을 보고 있을 경우란 드물겠지요.

 

현실이 가진 시간대는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심리가 자연숭배에서 자연지배, 그리고 이용하여 자신의 행복 구조론에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관계를 만들고자 하면서 생기게 됩니다. 호우, 홍수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것이 싫어서 치수공사를 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해관계이지만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해서 그것을 이용한 농작법이나 이동수단의 발달이 나타난 문명도 있는 만큼 실제 관습과 수단에 대한 인식은 그 사회와 문화, 그리고 지배적인 이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후 문화가 그것을 어떤 형태로 판단하고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가장 비판되기 어려운 것이 확정된 사회현상입니다.

고정된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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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정신성 약물복용은 나쁜 것이다.

라는 비판기준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약물복용이 일상적인 사회가 행복의 조건이다 라는 다른 기준을 내세운 울트라헤븐같은 작품을 보면 현실비판과 더불어 상업적인 새태를 비판하는 형상이지만 그런 세상, 일상적인 만화나 사회에서는 생각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구조를 재미있고, 흥미롭고 또 인상적으로 구성지어 보여주는 작가의 역량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악마라는 존재는 인간이 가진 탐욕이나 욕망, 욕구를 만족시키는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무조건 인간이 가진 탐욕, 욕망 자체에 매력을 느껴서 한없이 만족시키려하는 악마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가정으로 작품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요.

 

과학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만족스러운 미래를 위한 도구이다.

이 설정과 달리 너무나도 완벽하게 발달된 과학세계에서 더욱 원시적이고 더욱 원초적이면서 자연에 가까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목적, 행동이 만화의 주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만들자.

그러나 돈이 너무 많은데 행복하지 않아서 미치려는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라도 돈으로 행복을 사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풍자를 그릴 수도 있겠지요.

 

학교는 신성한 교육과 질서의 장소이다.

학교에서 불량하기 그지없었던 문제아가 자신을 지도했던 선생 입장으로서 학교에 돌아가게되면 과연 좋을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이 가지고 있는 목적, 목표의식과는 달리 작가가 생각하는 문화에 대한 기준,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은 어떤 흥미유발적인 상상력의 가능성을 보지만 비평에서는 초기에 가졌던 흥미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가에도 관점을 두게 됩니다. 시작은 a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끝은 전혀 다른 x라는 형태로 마감되는 작품을 보면 과연 이 작품이 왜 이런 형태를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순수한 사랑을 추구한 한 인물이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구애하고자……세계정복을 했다.

라는 결과를 가지고 말을 하라면 개그, 코미디 만화가 아닌 이상 굉장히 묘한 설정이 된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조은 작품이라는 것은 대부분 시작과 끝이 좋은 작품에 대한 평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편이 되면서 걸작이 되는 경우가 드문 건은 그만큼 주제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공요소, 조건이라는 것을 갖추게 되면서 변질되는 작품은 많이 있습니다. 특징적인 세계관을 창조해놓고 결국 일반 다른 흥행만화의 요소로 복합되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보게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요구하는 단편적인 감동의 구조는 대부분 자신이 가진 도덕관념에서 기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도박의 연관성을 이성적으로 풀이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감상적으로 몰아붙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도 있습니다. 화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수학적으로 까발려보기도 합니다. 판타지와 의학을 동원한 정신감응, 물리적 충동, 심리적 이해를 통한 결정이 사랑은 도박이다! 라는 결론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확률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결론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볼 때 범작과 걸작이 갈라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명작이었던 작품이 지금에 와서는 다른 세대, 다른 공감대를 가진 사회구성원에 의해서 완전히 다른 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렸을 적 배웠던 흥부놀부전은 착한 흥부의 관점에서 도덕관념을 배웠고 이해했지만 수십년이 지나보면 경제적, 물질적 사회주관에서 볼 때 패배자이면서 목적의식이 없는 단순한 저급노동작계급이면서 배우지 못한 비효율적 인간의 상징으로 비출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문학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논해야 하는 흥부전 창(), 판소리를 비판하는 경우는 전혀 연관성이 다른 비약론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런 것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또 다른 문화적인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랩가사를 판소리로 부르면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그려진 대하로망 만화가 우리들 사회에서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입니다. 



P 만보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